화천 625 전적지 탐방과 닭갈비
전일 한글날 포함 연휴를 맞은 10월 10일 가을 하늘은 맑고 천명하였다. 아마도 가장 좋은 계절을 맞았다 생각되어 집사람한테 차를 타고 바람을 쐬러 나가자 하였다. 어제 김치를 담고 빨래를 하는 등 집안일을 마친 상태여서 집사람도 동의하여 춘천 북방 625 전적지 및 닭갈비를 먹으로 가기로 했다. 오전 10시 집에서 출발하였다. 목적지는 춘천이었으나 1951년 4월 중공군 춘계대공세 때 격전지를 둘러 보기로 했다. 주요 격전지는 미 해병 1사단의 한 대대가 싸웠던 사창리와 북한강 사이의 Horseshoes Ridge, 화천 북방 고지, 북한강 서안, 국군 6사단의 사창리, 가평의 목동 등을 염두에 두고 출발하였다.
그러나 서을/양양(춘천)간 고속도로가 막힐 것으로 생각되어 잠실철교를 건너 강변북로를 타고 남구리
IC로 진입 구리/포천 고속도로를 탔다. 이
도로는 지난 4월 15일 어머니 모시고 나왔다가 별내휴계소에서
나에게 심근경색이 와서 되돌아 갔던 아찔한 기억이 있었기에 다시 주행을 하는 것에 대해 남다른 감회가 있었고 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뿐이다. 민락 IC를 통과하여 축성령 터널을 통과하면서 625때 북한군이 남침 시 서울을 방어하기 위한 전투에서 북한군 탱크를 최초로 격파한 지역임을 생각했다. 한 40분 달려 고속도로 종점인 신북IC를 빠져 나오자 마자 차들이 줄지어 서 있어 거북이 걸음이었다. 운천을
거쳐 철원으로 가는 43번 국도였다. 포천방어벙커 이정표가
보이고 전에 도로를 따라 좀더 올라 가서 보았던 38선 휴계소의 천변 방어요새도 생각이 났다. 625 남침 때 최초 전투가 있었다는 만세교리 근처의 분기점에서 37번
국도를 타고 동쪽 일동방향으로 달려 나가다가 이동을 거쳐 김화로 뻗혀 있는 47번 국도를 갈아타고 다시
북쪽으로 달렸다. Navigation에
화천을 찍어 놓아서인지 백운계곡으로 빠져 나오도록 지시가 되어 계곡사이로 들어 가 372번 지방도를
탔으나 광덕산과 백운산 사이의 능선을 넘는 길이 너무 험하다 생각하여 차를 돌려서 다시 47번 국도로
들어가 북쪽으로 달려 공덕산 북단에서 남하하여 사창리로 가고자 의도했다. 그러나 Navigation을 의존하다 보니 56번 지방도를 빠져 나와 북쪽으로
주행하여 우측으로 복계산을 끼고 56번 국도를 타고 화천 방향으로 남하하였다.
오후 1시 집 떠나 쉬지 않고 3시간 주행을 했기에
차를 데고 잠깐 쉬면서 늘 하듯이 어머니께 전화통화를 하며 안부를 전했다. 그 장소가 다목리(봉오리) 버스터미날 삼거리였으며 이정표 상 마현리 신병교육대가 표시되어 있었다. 모처럼 식당이 보이자 집사람은 점심을 사 먹자고 하였으나 어중간하여 좀 더 가 춘천에서 점심 겸 저녁을 먹자
하였다. 이 때에는 몰랐는데 집에 와서 보니 근처에 인민군 막사가 있다는 것을 지도를 보고 알았다. 동남쪽 화천방향으로 461번 지방도를 타고 달렸는데 북한강으로 흐르는
파평천을 따라 길이 나 있었다. 화천에 진입하는 동안 김화지역과 화천으로 향하는 도로에는 차가 거의
없었고 내 차만 유일하게 주행하였으며 이 도로 역시 난생 처음 가는 것이었다.
화전시에 진입하여 북한강까지 진입한 후 동쪽으로 파로호를 향하여 주행하다가 화천발전소와 파라호전시관을 탐방하기 위해 대붕교를 건너 북한강을
통과 10km 달렸다. 좌측으로 화천발전소가 보여 주차장에
차를 데고 주변을 둘러 보았는데 전공비가 있었다. 이 전공비는 국군
6사단의 발전소 탈환에 대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발전소에서 1956년 건립했다 기록되어
있었다. 전공비 주변으로 매봉산 줄기가 북한강으로 뻗여 있었으며 능선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도로를 타고
좀더 올라갈 필요가 있었다. 차를 타고 안보전시관으로 향해 잠깐 나아가자 시설과 넓은 주차장이 보였다. 매봉산 능선에 가까워졌다 생각되었으며 1951년 4월 당시 화전발전소 수문을 탈환하고자 사투했던 미 육군 1기갑사단(7연대 2대대 및 특수부대)의
진격로 탐방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당시 북한군이 파라호 수위를 높이어 한꺼번에 방류함으로 서
북한강 하류에 설치되었던 미군의 가교들을 파괴하려고 했고 실제 피해가 있었기에 발전소보다 북쪽으로 반도처럼 뻗혀 매봉산 줄기 끝자락 딴산 아래
있는 수문을 탈환하거나 파괴할 필요가 있었다 한다. 전시관은 전에 둘러 보았기에 차라리 인근에 있는
파라호전망대를 가기로 하였고 능선을 따라 좀 올라 가니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여기서 내려다 보니 파라호가 한 눈에 들어 왔으며 바로 밑으로 전에 보지 못했던 기념탑과 저수지로 향하는 작은 길이 보였다. 파라호를 내려다 보면서 좌측으로 수문 설치지점과 우측으로 미 1기갑사단
특수부대가 수문을 탈환하고자 상륙했던 북쪽의 산기슭이 보였다. 기념탐이 있는 남단은 회집들이 기슭에
보였고 유람선 선착장도 있었다. 현 전망대의 조망을 볼 때 당시 기갑사단 대대장이 경계초소를 설치하며
화천발전소 탈환작전을 지휘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물론 국군 6사단의
발전소 탈환작전은 중공군 5월 2차 춘계대공세 때 용문산
전투를 치루고 난 후 미 해병 1사단(1연대)과 합동으로 북한강으로 북진하여 시작되었다 생각되며 이 때 후퇴하던 중공군들이 북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파라호에
수장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망대를 내려 와 길을 건너 조국과 자유를 지킨 곳이라 표시된 기념탑을
확인 한 뒤에 옆으로 나있는 작은 길을 따라 저수지로 향하니 파라호 비라고 쓰여 있는 작은 기념탑이 서 있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사단을 방문하여 파라호라 글을 써서 6사단을 격려했는데 이를 보존하기
위해 6사단에서 탑을 세워 글자를 새겨 넣었다 한다. 그러나
저수지로 내려 가는 길과 딴산 봉으로 가는 능선은 군사시설로 외부인 출입금지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화천발전소 지역 탐방을 끝내고 남쪽으로 하류하는 북한강을 둘러 보고 춘천에서 식사를 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북한강 전투지역은 여러 번 방문 했었는데 1951년 4월 중공군 춘계 대 공세 때 국군 6사단이 패주함에 따라 미 해병 1사단의 측면으로 파고 들어 오는 중공군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막은 사창리와 북한강 사이 지존천편 북단에 있는 Horseshoes Ridge와 미 해병 사단의 유일한 보급로인 북한강의 마전교(현재는 수몰되어 있으나 당시는 인람리 야산을 따라 북한강변으로 길이 있었으며
38선이 지나 가기에 다리가 경계가 되었다 함)를 사수하기 위한 화악산 자락에 있는 원평면
말고개(현재는 말고개터널이 뚤림)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화천시 남단의 분기점에서 북한강을 건너지 않고 김화에서 내여 오는 5번
국도를 타고 북한강변으로 달렸다. 이 길은 625당시 춘천으로부터
화천으로 오는 주요 도로였고 Horseshoes Ridge와 연결되며 말고개와 연결된다.
주행하는 동안 좌측으로 청명한 가을하늘 아래 파랗게 북한강이 흘러 내려간다. 말고개에서 옛 길로 들어가니 차들이 다니지 않아 폐허상태이나 자전거타는
일행이 어렵게 고개를 오르고 있었다. 굽이굽이 고개길을 돌아 나아 가니 원평리 마을과 38선 표식석이 보였다. 이 마을이 당시 북한강 동안으로부터 마전교를
건너서면 있었으며 남북이 625직전까지 대치한 마을이라 한다. 지형적으로
북한군이 내려다 보고 있는 조건 때문에 국군은 마전교 넘어서 주 방어선을 형성했다고 한다. 625발발
직전 북한군이 마을의 노인을 시켜 마전교를 도보로 건너도록 함으로서 국군이 설치한 지뢰에 폭사당한 사건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다리와 도로가 수장되어
인근에 났시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말고개와 이어진 화악산 고봉은 국군 6사단과 작전경계를 이루 고 있었으나 사창리에서 패주하여
일시에 가평까지 중공군이 진출하면서 측방의 미 해병을 고립시키기 위해 화악산 능선으로 내려와 마전교를 점령하고자 하였고 이 의도를 알아 첸 미
해병은 중공군보다 먼저 말고개 계곡에서 화악산으로 진격하여 중공군의 기습을
막은 후 퇴로가 확보되지 철수하였다. 이 화악산 능선 밑에서 남측으로 북한강에 도달하는 길은 같은 가평
북방 목동에서 동쪽으로 인란리 북한강변으로 연결된 길이 하나 더 있었는데 같은 시기 6사단을 무찌르고
가평까지 진격 한 북한군을 막기 위해 긴급 배치된 미 9군단 예비대인 영연방사단(호주/NZ/Canada 대대)의
호투에 따라 중공군의 진격이 저지되고 미 해병이 남쪽으로 철수하면서 중공군의 기습로로는 활용되지 않았다 보인다.
어는 덧 시간이 오후 4시반이 되었기에 춘천댐을 건너 춘천으로 들어가 춘천 닭갈비를 먹었다. 굽는 방식인데 매콤하게 양념을 해서 적쇠에 굽는 방식이라서 닭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나도 먹을 수 있었고 된장찌개에
공기밥을 추가하여 저녁을 끝냈다. 돌아오는 길은 공지천을 따라 남으로 뻗혀 있는 길을 따라 저녁 6시경 춘천 IC로 진입하여 중앙고속도로로 진입하여 서울/양양간 고속도로로 바꾸어 탔다. 중앙고속도로 진입하자 춘천휴계소가
보였는데 이 도로 밑으로 당시 국도의 계곡사이에 원창고개가 있는데 춘천을 탈환하고자 하는 미 해병과 저지하려는 중공군과 치열한 교전이 있던 지역이라
알려 졌다, 고속도로는 비교적 잘 달렸으나 강촌을 지나 설악 IC부터
꽉 막혀서 서종 IC에서 나와서 남한강을 따라 우측으로 남하하는
391지방도로를 타고 내려 왔으나 양수리에서 양수대교를 건너 북한강 북단으로 해서 서울로 귀향하는 길이 완전히 막혀 1시간 이상 지체하였기에 집에 도착하니 밤 10시였다. 결과적으로 양수리에서 좀 더 빠른 방법은 양수대교로 우회전하지 않고 좌회전하여 세미원을 통과하여 양수교차로에서
양평/서울 간 6번 국도로 진입하는 것이 좀 더 낳지 않았나
생각한다.
오전 10시에 출발 밤 10시에 도착하니 꼬빡 12시간 여정이었으나 가보지 않았던 김화지역과 화천 북단 산야를 주행하였고 의도한 625 전적지 탐방과 전몰장병에 대한 추모의 시간은 대단히 뜻 깊었다 자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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