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bering the British Ulster Rifles’ Happy Valley Battle and Their Lofty Sacrifice for Safety of The January 4th Retreat in 1951. 1951년 14후퇴 때 UN군과 시민이 한강을 건너도록 서울 북방에서 방어하던 영국군 희생에 대하여
The following story I am about to present recounts a British battle that took place on the night of January 3rd, 1951, in the northern outskirts of Seoul during the Korean War.
아래 글은 1951.01.03 밤 서울 북방에서 1.4후퇴를 엄호하고 철수하던 중 미군이 잘못 투하한 조명탄에 노출된 영국 Ulster(Royal Ulster Rifle) 대대가 중공군의 공격에 맞서 장렬히 싸우다가 대대장 이하 157명이 전사한 전투에 관한 기록이다.
이 기록은 Wolf Dog이 전투현장을 상세히 탐방하며 참전했던 재향군인과 목격한 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상세히 기술하여 발표한 기록에 근거한다. 이분의 정보 없이는 결코 비극적인 서울 북방 곡릉천변에서 Happy Valley 전투와 영국군의 희생이 한국인에 잘 알려질 수 없다 생각되어 깊은 감사를 드린다.
The RUR lost 157 men during that hideous struggle, but their day-and-night fight was not in vain: They bought time for thousands of Korean refugees to cross the frozen Han during the "January 4th exodus."
영국 Ulster 대대는 1.4후퇴 직전 차가운 겨울 밤에 이억만리 대한민국 서울북방 고양의 한 곡릉천변에서 중공군의 기습공격에 대항하다가 157명이 전사하며 거의 전멸당하였으나 그 희생으로 서울시민과 UN군이 한강을 건너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기에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In May 1951, the RUR erected a Korean granite memorial on the battlefield they dubbed, with grim irony, "Happy Valley." But after local peasants dismantled the memorial base for construction materials and overturned the obelisk, the memorial was relocated to Northern Ireland in the 1960s. Today, refurbished, it stands outside Belfast City Hall.
1951년 5월 생존한 Ulster 대대원들이 동료 전우들이 쓰러져간 비극의 전투장소인 매내미고개 산허리에 석재 충혼탑을 세워 추모를 하고자 했으나 이 후 쓰러져 방치되었고 1960년에 이 석조물은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 시청 내로 옮겨져 재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The New Year of 1951 began on a grim note. A month earlier, the American and South Korean Forces had suffered for a surprise attack from the Chinese Communist Forces near Unsan north of Pyongyang in North Korea and had been issued a general retreat southward, crossing the 38th parallel and withdrawing to Seoul. The city had experienced six months of brutal suppression since the breakout of the Korean War with the aggression of the North Korean Communists. Due to fear of communist re-occupation, Seoul citizens and other province refugees were leaving the city.
1951년 1월 1일 암담한 새해가 밝았다. 한 달 전 운산에서 중공군에게 기습당했던 미군은 총 퇴각 명령을 내리고 38선을 되 넘어 서울까지 철수했었다. 서울은 6·25전쟁 초기 석 달간 북한 공산당의 정떨어지는 행패경험과 정부의 피난권유로 시민들은 피난을 떠나고 있었다.
On this day, the British 29th Brigade, which had advanced north along the western coast to Anju in Northwest Pyongyang before retreating to Seoul, received orders to reverse their course and engage with, in a flank attack, the pursuing Chinese Forces threatening the withdrawal of the South Korean 1st Division defending the northern outskirts of Seoul. However, due to General Ridgway's decision to abandon Seoul, the order was immediately changed to guard the withdrawal of the South Korean 1st Division and to delay the Chinese advance before ultimately retreating across the Han River.
정초 새해 첫날인 이날 서해안을 따라 멀리 평북 안주까지 북상했다가 서울로 철수했던 영국군 29여단은 명에 따라 거꾸로 북진 길에 올랐다. 서울 북방에서 서울을 방어하고 있던 국군 1사단에 추격해온 중공군이 압박을 가하고 있으니 그들의 측면을 찔러서 궤멸시키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Ridgway 장군의 서울을 포기하는 철수 결정으로 이 명령은 국군 1사단의 철수를 엄호하고 중공군의 진격을 지연시켜 UN군과 서울 시민의 피난을 엄호하다가 다시 명에 의해 한강을 건너 최종적으로 후퇴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The brigade set up positions in the northern outskirts of Seoul, waiting for the Chinese forces to approach. The snowy landscape added to tension. The British 29th Brigade consisted of three battalions, with the Ulster Battalion forming a defensive line on the west side of the brigade along the border of Goyang and Yangju counties near the 'Little Hill' area now known as Janggo-gae Pass. The order to withdraw reached the Ulster Battalion one hour after the neighboring units had received it at 06:30 pm.
부대는 서울 북방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중공군의 내습을 기다렸다. 이들이 배치된 산등성이는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여서 더욱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북상한 영국군의 영국 29여단은 3개 대대였다. 한 개 대대, 즉 Fusillier에 대대는 우측 송추에서 방어선을 형성했고 Ulster 대대는 좌측, 즉 서쪽의 고양군과 양주군 경계선인 도로 좌우에 방어선을 만들었다. 다른 대대인 Gloster대대는 후방에 예비로 전개했었다.
이 곳은 고양읍에서 3킬로 지점이고 고양군과 양주군 경계선인 ‘작은 고개’지역이었다. 현재는 ‘쟁고개’로 불린다.
Ulster 대대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진 것은 인접 부대가 철수명령을 받은 시각으로부터 한 시간이나 지난 18시 30분이었다. 이미 어둠의 그림자가 찾아올 시각이었다.
Tragically, disaster struck the secretly withdrawing battalion at 09:30 pm on a pitch-black night. The lead B Company and Headquarters Company had already crossed the Maenami Pass heading towards Seoul, and some units were following in trucks. As US Air Force planes, responding to the earlier bombings in the area, began dropping illumination bombs, the entire movement of the British Forces previously concealed in darkness was fully exposed to the Chinese forces on the hill. The Chinese immediately opened fire with their automatic weapons and unleashed a barrage of mortar shells toward the British.
이 철수 부대에 갑자기 불행이 찾아온 것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 9시 30분이었다. 선두 B중대와 본부 중대는 이미 매내미고개를 넘어서 서울 불광동 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고 그 뒤를 일부 부대가 승차하여 트럭으로 후속하여 철수 중이었다.
이 때 검은 하늘에 출동한 미 공군기가 낮에 폭격을 했던 이 지역에 이르자 조명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어둠을 틈타 비밀리에 움직이던 영국군의 모든 것이 언덕위의 중공군에게 백일하에 들어났다. 중공군은 즉시 자동화기 포문을 열고 공격을 개시하고 이어서 수 백발의 박격포탄을 날려 보냈다.
The moving British Troops and Trucks were mercilessly pounded. Some trucks came to a halt or caught fire, and many infantrymen around the trucks got lost their lives. The most tragic battle was taken place at a small village of Pulmiji-ri near the Gokreung-cheon Railroad Bridge, which served as a collecting point for transport trucks.
이동하던 영국군과 트럭들은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맞았다. 일부 트럭들은 정지하기도 하고 불에 타기로 했고 주변의 많은 보병이 죽어 나갔다. 최대의 비극적인 전투가 대대가 중간 집결지인 곡릉천 철교 근처 작은 마을 불미지리(Pulmiji-ri) 인근의 수송 트럭 집결지에서 발생했다.
The Chinese Commander, recognizing the disarray caused by machine gun and artillery fires, ordered a storming charge from the hill to this location. With the sound of bugles, a large Chinese force descended like an avalanche from the hill onto the British forces. The situation was concluded by the early morning just before the January 4th Evacuation when everything was frozen, and a long line of Korean refugees crossed the Han River to flee from the communist reoccupation on foot. On this fateful night in the northern outskirts of Seoul, 157 members of the British forces lost their lives.
지휘관은 매우 노련하였다. 기관총과 박격포 사격으로 영국군의 지휘체계를 충분히 흔들어 놨다고 판단하고 언덕으로부터 이 지점으로의 돌격을 명했다. 돌격나팔 소리와 함께 언덕으로부터 중공군 대 병력이 새까맣게 언덕 아래 영국군의 측면으로 산사태처럼 쏟아져 내려와 부대를 덮쳤다. 상황이 종료된 이 때가 1월 4일 새벽 3시4분이었다. 피난민들이 꽁꽁 언 한강을 가로질렀던 14후퇴 직전인 이날 밤 서울 북방의 한 전투에서 영국군은 157명이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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