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초기 위기의 낙동강 전선 전투지 탐방 Exploration of The Nakdong River Defensive Line in Korean War(2022.7.25-30)
625 전쟁은 불과 70여년 전 우리 조/부모님 때 인권을 말살하고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및 전체주의 독재로 부터 자유 민주주의와 자유를 구한 것이었다. 물론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신앙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이동의 자유 등을 보장하는 대한민국 헌법아래 자유롭게 경쟁하며 행복을 추구하되 각자의 자유에 따른 행위에 대한 책임도 진다는 가치관과 사회적 규범을 갖고 60평생을 살아왔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또는 자유는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라는 격언은 우리가 지나온 시절에 어떻게 자유와 민주주의가 위태로웠고 또 어떻게 지켜 나가야 하는지 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
지난 수 년간 헌법에 반하는 가치관적 혼동이 우리 모두를 불안하게 하였기에 우리의 조/부모님과 대한민국이 625전쟁 참화 속에서 어떻게 대처하였고 우리의 혈맹인 미국은 이 급박한 시기에 어떻게 희생을 감내하였으며 UN은 공산주의의 도발에 맞서 무슨 결정을 하였는지 되새겨 보며 올바른 가치관을 회복하고자 옛 선조들의 산 지혜를 구하고자 하였다.
이 때 마치 전쟁기념관에서는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1주회 1회씩 5주간 특별 강연을 실시하였고 나와 우리집 사람은 매주 참가하게 되었다. 강연주제인 낙동강전선의 사투와 의의, 중공군의 항미원조 참전 및 공격작전 및 미래의 대 북한 대처전략 등 수강하며 체계적으로 전쟁사를 이해하게 되었고 특히 낙동강전선의 사투와 미 8군사령관 Walker장군의 위기상황에서의 지휘가 있었기에 공산화되는 길목에서 625전쟁에 대한 휴전과 자유대한민국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평소 강연과 관련되는 전사에 대한 정보를 다시 한번 숙지하면서 1950년 6월부터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된 1950년 9월까지 노도와 같이 밀려 드는 북한 붉은 군대의 군화발에 짓밟히는 풍전등화와 같았던 국가의 운명을 구한 낙동강전선의 사투 현장을 직접 탐방하며 그 때 그 장소에 있었던 국군과 이억만리 바다 건너 참전한 미군 등 용기와 희생을 기리고자 계절적으로 당시와 유사한 2022년 7월 말 주간 탐방계획을 기획하고 실시하였다.
I am very pleased to share my trip experience of the
Nakdong River Defensive Line with you for the commemoration of the
Korean War and for the sacrifice of our ancestors for our freedom and peace. It
is important reminding that we have a debt to our heroic ancestors, so we have
to transfer the free democracy and peace for our descendants.
It took 6 days for the trip with the budget of KRW
600,000. It took total 750 km drive to drive my own sedan along the points of
the delaying actions and for the defensive river line of the Nakdong-gang,
“General Walker’s Stand or Die”.
The Korean war had a meaning to save our free
democracy and people from the communist and its dictators who ignored the human
rights and individual freedom, 70 years ago.
We had got along to enjoy our freedom of religion,
speech, demonstration and transportation under our free democratic
constitution, pursuing freely for our happiness and taking responsibility for
the result of our behavior for over 60 years.
We needed to remind of the slogan that is Freedom is
not free or freedom and free democracy can grow with the blood from the
fighting against dictator. We needed to observe our politicians and their
legislative campaign for prevention of their hypocritical cheating.
So, I wished to remind of our alliance of the U.S.A,
the UN, and our ancestors that how did determine, fight and take sacrifice for
the aggression of the communist, and I wished to get a heritage from them.
Meanwhile, the Korean War Memorial Hall held the training session on Korean War
for 5 weekends, and I and my wife had appreciation to participate in the
sessions dealing with the fighting along Nakdong River Line, Chinese engagement,
counterattack of the UN, and strategy of the war.
Realizing it was vital to block the communist advance
and to end the war that our ancestors struggled to keep the Nakdong River Line
from the feet of the communist forces, I persuaded my wife to explore the
Defensive Line of Nakdong River, hoping to facilitate an experience to be on
the sites in the critical times.
1. 2022.7.25 서울에서 대전 이동: 대전1박(Toyoko-inn 대전정부청사) On the date of July
25, to Taejopn from Seoul
At about 13:00-13:30, we arrived at the park located in the north parking lot of Pomun Mountain and had simple lunches packed in Seoul. We drove along the mountain road to the outdoor theater and parked my car. At about 1500, we worshiped at the monument of Taejon District Battle and the monument of the UN for Taejon Battle.
여기서 미군들은 차량을 포기하고 인근 대전대가 있는 야산으로 각개 대피하여 후퇴를 도모하였다. 그 분은 국방관련 전문기관에 오랫동안 근무하다 전역 후 학교에 활동 중이며 독도법 등 인근 전사정보를 탐방객에 전수했다 한다. 2차적으로 철수를 시도한 미 24사단의 철수경로를 탐방하고자 1600-1900 대전여고를 출발하여 판암IC에서 세천공원과 당시 Tunnel까지 현 4번 국도로 주행하며 1950.7.20 저녁과 밤사이 벌어진 죽음의 후퇴로를 탐방하였다. 그리고 식장산문화공원(세천공원) 전망대까지 산길을 주행하여 정상에서 대전에서 옥천방향 미 24사단 철수경로인 죽음의 골짜기를 조망하였다.
Here at this school, the American troopers gave up their vehicles and fled into the nearby mountain, evacuating on walk to Ockchon in groups.
At about 16:00-19:00, We departed from the high school
and drove the distance between the Panam IC and Saechon Park & Tunnel to
explore the main withdrawal
road of the division. The withdrawal had been carried out on the late evening
of July 20, 1950, but become a bloody Death Valley for the American troopers.
We could drove along the winding mountain path to the observatory pavilion on
the Sikjang Mountain Culture Park(Saechon Park) where we could look down the
valley stretched through Taechong Reservoir to Okchon. Refer to the below photo
for the view of the valley from Sikjang Mountain Culture Park.
It was hard to identify the Saechon Tunnel regarded to
be closed down around the Saechon station, and we could identify the only
trails on which rails had laid at that time. We had opportunity to meet the old
man who was 92 years old and had been there in the war, explaining about the
tunnel location and the bombardment points of the American Shooting Stars. He
told us that this Ockchon area had not been destroyed severely because of a
retreated place in the valley of Kum River not merged into the current Taechong
Reservoir. But it was so late that we could not explore the mountain of
Kangbawi- Mountain near Sannae Primary School between the Pomun Mountain and
Sickjang Mountain, into which General Dean and his staffs on jeeps had been
shot and hid hurriedly.
2. 2022.7.26 대전에서 대구 이동: 대구 1박(Toyoko-inn 대구 동성로) On the date of July
26, Taegu from Taejon
대전 정부청사 앞 한 호텔에서 0830 출발하여 대전IC로 진입하여 경부고속도로 상 1시간 주행하여 황간IC로 나와서 영동황간로 상에서 서쪽으로 주행하니 노근리평화공원에 도착하였다.
We kicked off at 08:30 from Taejon and came into the
Taejon IC to drive on the Kyungbu Express Way. We drove out of the Hwanggan IC
for Nogun-ri Peace Park and arrived after 1 hour drive.
주차장에 차들이 거의 없어 한가한 분위기였고 본 공원은 방문자센터, 위령탑 및 평화기념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념관을 둘러 본 후 쌍굴다리를 찾았다. 이 다리는 한군전쟁 초기인 1950.7.26-29일 까지 4일동안 미 공군기와 미 1기병사단(7연대 2대대) 소속 미군 사격에 의해 수백명의 주곡리 및 임계리에 살았던 무구한 피난민이 희생된 장소이다. 종북 반미세력들이 본 노근리 사건을 미군에 의한 학살로 악용하는데 따른 문제도 있지만 보수적 관점에서도 전쟁 초기 남의 나라를 지켜주기 위해 갑자기 한국에 파병되었다가 대전과 영동에서 북한군에 의해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전쟁의 실상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된 미군들이 지레 겁을 먹고 과도하게 사격 등 작전을 실시한 비극적이고 우발적 사건이 발생된 후 종전이 되고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국가에서 억울한 피해자와 가족들을 구제하지 않고 상당기간 고통과 원한속에 방치한것은 국가적으로 정의롭지도 현명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쌍굴벽에 총탄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는데 하얗게 식별표식 하였고 숫자가 표식되어 있었다. 사건 당시 7월의 땡볕아래 무차별 사격에 내몰린 피난민들의 살과 피가 찢기고 튀는 공포가 그대로 느껴졌다. 쌍굴을 통과하여 황간측 동쪽방향에서 인접한 산길을 오르니 쌍굴 후방이 보였고 역시 피탄흔적이 보였으며 전망대로 이어지는 길이었고 희생자 위령비가 세워져 있었다. 평화공원을 가로 질러 서송원천이 쌍굴 한 쪽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고 우리는 다시 기념관 쪽으로 돌아와서 쌍굴 맞은편 야산근처까지 접근하여 2대대가 능선상에 진을 치고 사격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확인했으며 쌍굴에서 맞은편으로 330 m 떨어져 있었다. 노근리평화공원 및 쌍굴탐방을 마치고 1300 영동군 용산면 상용리 방향으로 주행하여 용암리 마을 보건소 근처에서 미 27연대 1대대가 영동의 1기갑사단의 후방 퇴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긴급 출동했던 지역을 탐방하였다.
We visited the Visitor Center, Memorial Monument,
Museum in the park and the Twin Tunnel. This tunnel was the place that 400
refugees from Jukock-ri and Imgae-ri of Hwanggan were shot, during July 26 to
July 29, 1950, to death by the troopers of the 1st Cavalry
Division in the time of imminent danger of North Korean’s round up. After the
fall of Taejon, the new division was hurriedly placed in this area to cover the
annihilated the 24th Infantry Division, and it was heard that
the North Korean Agents were disguising in the refugee for their ambush. We
investigated the bullet marks on the wall of the tunnel, the mountain side of
the back of the tunnel where the memorial monument of the sacrificed refugees
was erected. We also investigated the mountain ridge supposed to be the
defensive line of the 2nd Battalion of American Force, 300
meters off the tunnel.
이 지역은 북한군 2사단이 영동 동측으로 우회하여 황간을 점령하고 후방 퇴로를 차단하여 미 1기갑사단을 전멸시키고자 한 지역으로 황간 측 고지대의 2대대 및 미 27연대본부(다부동 전투에서 국군 1사단을 지원하고 영산지구 및 마산의 진동리 전투 등 낙동강전선에서 미 8군 예비대로서 취약한 전선의 기동타격 역할로 알려진 Michaelis 대령이 지휘) 측으로 축차적으로 후퇴하여 북한군 2사단을 1950년 7월 23일부터 29일 사이 진격을 저지시킨 작전이었다. 황간 전투지역에서 1330 다시 노근리평화공원으로 돌아와 황간IC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남구미 IC에서 나와 왜관에 도착 미 B29 100대 폭격기에 의한 낙동강 서안 칠곡군 약목 융단 폭격지역 맞은편 낙동강 동안 칠곡보 근처 왜관지구전적기념관을 둘러 보았다.
In this area, North Korean Force was ambushed and
destroyed during July 23 to July 29, 1950, that they could not cut the rear
route of the 1st Cavalry Division in Hwanggan.
At about 13:30, we entered through the Hwanggan IC to
the Kyungbu Express Way and drove out of the South Kumi IC to the area of
Yakmok in Chilgock bombarded heavily by 100 American B-29 Bombers. We also
dropped by the battle memorial hall of Waekwan District.
그리고 작오산을 북쪽으로 우회하여 왜관 북방의 작오산(303고지)을 점령한 북 제3사단의 일부 병력이 이곳을 지키던 미 제5기병연대 소속의 박격포 소대 소대원 26명을 포로로 잡았다 학살한 작오산 근처 한미우정의 공원을 탐방하였다.
At about 16:00, We departed from Jacko Mountain and
drove along the valley between Suam Mountain and Youhak Mountain to visit the
Battle Monument of Dabu-dong and the battle place of the Bowling Alley in
Cheonpyong Valley. Colonel Michalis’ 27th Regiment supported
General Paik’s 1st Division in this valley to block the strong
attack of the North Korean Tanks for their occupation of Taegu. Refer to the
below photo for the entrance of Cheonpyong Valley featured from the battle
monument of Dabu-dong.
After visiting the memorial hall in Waekwan, we
detoured north of Jacko Mountain(Hill 303) to come to the Park of
Korea-American Friendship where 26 Cavalry Troopers had been caught up and
killed by North Koreans in the initial process of Nakdong-gang Defensive
Battle. They were disguised by the North Korean Wireless Radio that ensured
them in English to be evacuated by a friendly South Koreans. Refer to the below
photo for the Park of Korea-American Friendship.
이 미군들은 인근 국군이 구출하러 온다는 거짓 무전에 속아서 위장한 북한군에 잡혔다 한다. 1600 작오산 탐방을 마치고 수암산과 유학산 남단 계곡사이 국도를 타고 동쪽으로 주행하여 다부동 전적기념관(유학산과 가산사이 가산면 금화리 126-2)과 북측으로 Michaelis 대령이 이끈 27연대 전차부대의 천평계곡(Bowling Alley) 을 탐방하였다.
3. 2022.7.27 대구에서 창원 이동: 창원 1박(Toyoko-inn 창원) On the date of July 27, Changwon from Taegu
08:45 대구 숙소 출발 옥포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지선으로 미국 감리사 가 설계한 국내 2번째 고속도로)를 타고 현풍휴계소에서 들러 Coffee한잔하고 주변의 500년 된 나무를 본 뒤 09:30 오항 북단의 진창리 용석촌이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차를 데고 걸어서 야산을 넘어 강변으로 가 남측으로 오항측 북한군 도강지점과 북측으로 부곡리 도강지점을 확인하고자 하였으나 강변 나루터 추정지역에 농업용 배수장이 설치되어 도로가 차단되어 강변만 확인하였다.
At about 08:45, we drove the Inter-continent
Expressway, designed by an American Supervisor as the 2nd Pavement
of the Expressway in Korea, through the Ockpo Junction and dropped by the
Hyunpung Service Area, looking at the 500 years old tree with a cup of coffee.
At about 09:30, we drove off the Changryong IC and drove to the point where the
creek of Yongsok-chon is merged into the River of Nakdong, parking and walking
into the riverside forest to explore the river crossing point of North Koreans
in Ohang village. But it was impossible to be close to the point due to the
agricultural facility of water supply, but only possible to observe the river
and its riverside in distance. Refer to the below photo for the access path to
the facility and river.
1030 출발하여 1100 박진 전적기념관 도착 참관한 후 주변 야산에 설치된 박진지구전적비를 참관하였다. 비문에는 “이곳에서 미 제24사단, 미 제2사단, 그리고 미해병 제5연대(1사단)가 보여준 百折不屈(백절불굴)의 투혼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것이니…”라고 쓰여 있다.
At about 11:00, we drove and arrived the Monument
Hall of Pakjin District, paying our respect to the monument in a mountain side.
It was written on the monument that Republic of Korea was due to the never
yielding fighting spirit of the 24th American Army Division, 2nd
American Army Division & 5th American Marine Regiment.
Refer to the below photo for the Monument Hall of Pakjin District.
1330
1950.8 창령영산지구 전투가 가장 심하게 벌어진 고운봉 등 주변 200m 고지군으로 형성된 Clover Ridge와 남측으로 뻗은 오봉리 Ridge가 접하는 고곡리와 마을에서 북서쪽으로 난 오항 가는길을 탐방했으며 이 도로를 통해 맞은편 강변 합천/의령측에서 도강한 북한군이 주요 교두보 확보를 위한 이동경로로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나루터가 없어져 사용되지 않는 소도로이다. 아래 사진에서 우측 강변은 부곡리로서 미 21연대에 의해 도강이 저지되었으나 좌측 강물이 굽이쳐 우측으로 내려가는 정면 계곡사이 오항으로 북한군이 대거 도강을 하였다.
At about 13:30, we explored the area of Kokok-ri,
where the mountain ridge of Obong-san and Clover were butted with, and the path
of Ohang stretched northwestward from the village. This small path not used
nowadays was a main advancing route for the North Koreans crossing the river
from Hapchon and Euiryong.
박진교를 건너 박진마을회관근처에서 강변 둑박길로 올라 차를 세운 후 북한군 중점 도강지역인 박진교 주변 강변을 확인하였고 맞은편 박진지구전적비가 멀리 보였음. 이 지역에서 북서쪽으로 5km 정도 떨어져 의령군 부림면 신반리에는 낙동강을 도강하여 미 24사단을 공격한 북한군 4사단 사령부가 있었고 9월 2차 공격 시 미 24사단과 교체한 미 2사단을 창녕군 현창리 및 부곡리쪽으로 공격한 9사단 사령부가 합천군 초계면에 있었다 한다. 아래 사진은 북한군측 입장에서 도강할 때 전경이며 강뚝 아래로 나루터가 있었다 추정되고 강 건너 박진지구가 보인다.
We crossed the river through the bridge of Pakjin and
parked on the riverbank, observing the riverside and the monument of Pakjin in
long distance. Not far from here, it was told the Head Quarter of North Korean
4th and 9th Divisions had been established in
Sinban-ni of Purim-myon of Euiryong. Refer to the below photo for the scenery
of the riverside of the Pakjin Bridge on the opposite side of the monument.
1500 오봉리 Ridge를 출발하여 남지교를 경유하여 진주에서 유입되는 남강을 따라 우측으로 난 길을 타고 주행하여 함안을 거쳐 서북산과 대부산으로 가로막힌 계곡 끝단 별천계곡에 1630 도착했다. 남지교는 창령영산전투 시 함안 남단의 여항산과 서북산에 거점을 둔 북한군의 주요 침투지 가운데 하나이며 당시 영산까지 침투당한 미 24사단 34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긴급 출동한 미 8군 예비대로 있던 미 25사단 27연대의 반격작전 시 도강한 경로이기도 하다.
At about 15:00, we kicked off the ridge of Obong-ni and crossed the bridge of Namji. We were driving south on the road by the river of Nam River flowed from Jinju and arrived the valley of Byol Creek between the Mountains of Seobuk and Taebu at about 16:30. The bridge was used, as a main attacking route for Youngsan, by the North Korean Force dominating the Mountains of Seobuk and Yoihang. It was also used by the 27th American Regiment of the 25th Infantry Division, the single reserve force of the 8th US Army called upon immediately to fight in Yongsan.
마산창령지구가 미 24사단의 방어지역이었다면 이 지역은 미 25사단의 방어지역이었으며 Walker 장군은 1950.7 당시 북한군이 호남을 경유하여 진주를 경유하여 김해를 거쳐 바로 부산으로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따라서 10개 북한군 사단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병력을 고려하여 이 지역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고 강이 S자로 형태로 우회하여 흐르기에 유속이 낮고 수심이 낮은 박진지구 등 돌출부를 포함한 낙동강 전선 및 대구 북방 방어에 집중하던 중이었다. 미 8군 사령관은 상주지역을 방어하던 25사단을 멀리 진주까지 긴급하게 투입하는 결정을 내리고 대구에서부터 열차로 병력을 이송하여 마산을 방어하였으며 추가적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미 본토로부터 증원된 미 해병여단 및 2사단을 추가 투입하여 1950.8 진주/사천까지 공격하는 작전을 지시하였다.
At the valley of Byol Creek, the torso of Colonel Timmons of the 5th RCT of the 25th Infantry Division killed in action in the battle of Seobuk-san Mountain. This site was 20 km south off the primary school of Jindong. General Walker thought that the North Korean Forces would not advance to this area, so he did not place his force around the area of Chinju and Masan. As this area was occupied by the North Koreans and the main port of Pusan was directly threatened, he ordered his 25th Infantry Division to board on the trains for Jinju and to block the enemy advance. He also put into this area, the new American forces of the Marine Brigade and the 2nd Infantry Division arrived in Korea. The Marine Brigade was originally reinforced for the landing operation of the Chromite in Inchon.
4. 2022.7.28 창원에서 진주 이동_71km_진주 1박(뉴라온스테이) On the date of July 28, Chinju from Changwon
마산 숙소에서 1박한 후 조식을 하고 0830 출발하여 남해안대로를 타고 마산만을 지나 현동교차로 통과하여 1000 진동리 진동초교에 도착하였다.
At about 08:30, we started from our accommodation in
Changwon and arrived at the primary school of Chindong, driving along the South
Seashore Road and passing by the bay of Masan and Hyondong Crossroad at about
10:00. Refer to the below photo for the school.
We explored around the village near the school, and the Summit of 250-meter-high Siru. On the date of August 2, there was a big battle between the 27th Regiment of American 25th Division and the North Korean 6th Division on the playground of this school. The North Korean Division was composed of the Korean Chinese Troopers engaging the Chinese Civil War between Mao and Chang Regimes and designated as a reserve force to ambush at a critical time. This division had advanced the Province of Cholla and advanced invisibly up to Jungam-ri and Chindong-ri of the rear of the American Forces after occupation of Chinju.
At around 11:00, we drove west from Chindong-ri to the
crossroad of Imgok in Jingok-myon and then drove north to arrive Pongam-ri at
about 11:30 for excursing, so called, the Grave of American Artillery.
Refer to the below photo for the valley of Pongam-ri.
봉암리는 미 포병의 무덤으로 비극적 장소로 알려져서 탐방하였는데 미 5전투연대에 소속된 지원포대가 1950.8.11밤 봉암리 계곡에서 철수 중 북한군에 포위되어 전멸된 장소였다. 양천리 대청마을과 진전천 주변을 도보로 걸으며 사방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내 죽어간 미 포병대원(미 본토에서 이억만리 바다건너 막 투입된 젊은 병사들)을 생각해 보았다. 좁은 계곡에서 철수 시 소속한 보병들의 지원포대 엄호에 문제가 있었다 생각이 되지만 포병 본인들도 적의 공격을 받을 때 즉각 보병과 같은 임무로 전환하여 자체적으로 방호 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이 사건으로 사천까지 진격했던 미 5 해병연대 일부 병력을 긴급 차출하여 1950.8.13 봉암리 진천천에 연한 능선으로 구출작전을 전개하였다. 계곡 탐방을 마치고 1230 봉암리계곡을 빠져나와 1300 남서쪽으로 14번 국도를 타고 주행하여 배둔리에 도착하였다.
This area was told that an Artillery Unit of the 5th Regiment Combat Team was surrounded and annihilated by the North Korean ambush in the process of its withdrawal on the date of August 11, 1950. We explored the village and creek in this valley and thought of the young American Troopers who couldn’t defend themselves but die. This incident called upon the American Marine Brigade to stop advancing toward Sachon but to save the artillery.
At about 12:30, we drove out of the Grave of American
Artillery and arrived in Paedun-ni at about 13:00. Refer to the below photo for
the ridge of Paedun-ni.
배둔리는 미 해병여단이 마산 진동리 고지에서 북한군을 격파한 후 사천을 향해 진격 중 저지하는 북한군과 교전을 치룬 장소였다. 1400 고성에서 점심을 사 먹고 북서쪽 사천공항 방면으로 뻗은 33번 국도를 타고 주행하여 1600 사천시 정동면 근처 야산의 고지군에 도착하였다.
This place was the battle place between North Koreans
and the American Marines advancing toward Sachon after defeating a North Korean
Unit in Dabu-dong. We had a lunch at Kosong and drove north-west on to arrive
in the ridges of Chongdong-myon of Sachon at about 16:00.
미 해병대의 당시 작전도를 참고하여 현 위치가 북한군이 진격하는 미군을 상대로 학익진 형태로 방어하며 화력을 집중시키지 않았을까 추정하였다. 사천점령을 목전에 두고 본 전투에서 미 해병은 자체 F4-U Corsair 전투기를 동원하여 폭격도 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중 미8군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타 지역 구출작전(1950.8.11밤-12새벽 발생된 미 5전투연대 지원포대가 마산 봉암리 계곡에서 전멸되었다.)을 위해 긴급 철수명령을 받고 철수하던 중 실종된 전우를 찾지 못하고 남겨두고 명령에 따라 떠나야만 하는 미 해병의 슬픔에 대한 기록도 볼 수 있었다. 미 해병의 신조는 전투 중 동료 해병을 죽든 또는 부상을 당하든 절대로 적진에 홀로 남겨두지 않는 것이었다 한다. 지형을 살펴보니 미 해병대의 진격로는 보다 내륙에서 진주로 진격하는 미 25사단이나 5전투연대보다 남해안 도로에 연한 산악지형이 마산의 진동리 고지군을 제외하고는 상대적으로 덜 위험해 보였고 그래서인지 진격속도도 훨씬 빨랐다 한다. 탐사를 하는 동안 차량은 사천공항에 가까운 노천마을회관 앞 사천강변에 주차해 놓았고 강뚝을 따라 계곡에 연한 산능선을 확인하였다. 사천에서 진주방향 북쪽으로 2번 국도를 타고 화개교차로에서 동측으로 3번국도로 갈아타서 진주고개 전투지에 도착하였다.
In accordance with the operational map used by the
American Marines, we were supposed to locate the battle point which was a
valley surrounded by the mountains. During the battle, the Marine Brigade was
ordered to withdraw for the rescue operation. They had to stop their fierce
attack under support of their Colsaire bombing and move to the valley of
Pongam-ni, the Grave of American Artillery. After parking at the riverside of
the Creek of Sachon near the Community Center of Nochon Village, we explored the
battle valley and creek surrounded by the mountains.
본 고개는 미 27연대 1대대가 마산에서 혈전을 치루면서 진주까지 북한군 6사단의 주력 소재를 파악하고자 전차를 앞세운 위력정찰 지역이며 북한군의 공격으로 전차와 차량이 파괴되고 주변의 북한군에 포위될 위험성이 있어 남서쪽의 진동초교로 복귀를 시작한 장소이기도 하였다. 북한군은 미 1대대가 진동초교로 복귀한 사실을 모르고 진동초교에 있던 미 27연대 본부를 기습하려다 크게 격퇴당했다. 1830까지 진동리에서부터 진주고개까지 탐방을 마치고 진주의 한 숙소로 복귀하였다.
On this pass, the 1st Battalion of the
Michaelis 27th Regiment was patrolling with their tanks to
locate the main force of the North Korean 6th Division and
withdrew, when they were attacked, and some tanks were destroyed, back to the
Primary School of Chingdong where they defeated North Koreans.
5. 진주에서 통영/대전 및 서울귀경
5-1, 2022.7.29 진주에서 대전이동_대전1박(Toyoko-inn 정부청사) On the date of July
29, Tongyoung from Chinju
- 해병대 통영 상륙작전기념관: 김성은 중령 한국해병 1대대
- 통영 시내관광: 통영 Cable Car 탑승, 동양 Naples (해저Tunnel, 충무교 등 운하) h
- 이순신 공원: 한산대첩 현장
We visited the Monument Hall of the Tongyoung Landing
Operation of the Korean Marines and toured to board on the cable cars and to
stroll in the park of General Lee SunShin.
5-2 2022.7.30 대전 서부지역 탐방 후 귀경 On the date of July
30, Taejon from Tongyoung
- 후기: 대전의 숙소에서 제공되는 조식을 들고 0845 출발하여 가수원교 근처로 주행하였다. 당초 대전전투와 관련 낙동강전선 여행 첫날 옥천방향의 미 24사단 죽음의 철수지역 등 동부지역을 탐방하였다면 마지막날 금번 대전 탐방은 서부지역 갑천에 연한 원평정수장, 도솔산과 가수원교를 계획하였었다. 그러나 도솔산 북단 원평정수장 지역은 몇 년 전에 탐방한바 있어 이번에는 남서쪽 논산쪽에서 올라오는 북한군을 대적하기 위한 계백로상의 가수원교 및 인근 전투지역을 보다 중점적으로 탐방하였다.
그러나 도솔산 진지 및 유성과 연결된 만세교와 계백로에 연한 도솔산 월평공원 진지에서 후퇴했던 미 34연대 1대대 및 가수원교 서측을 방어하기 위해 긴급 투입되었다 격퇴당한 된 미 19연대 2대대의 보문산 진입로로 추정되는 오월드네거리-오월드-사정공원- 대전보훈공원 탐방 및 보문산 산허리 대별동에서 북한군 유격대와 총격전을 벌인 미 34연대 1대대가 무수동에서 산성동 미 19연대 2대대의 한 중대와 합류 전주로 탈출한 지역에 대한 탐방은 시간이 부족하여 포기하였다. 가수원교는 논산으로부터 진격해오는 북한군을 저지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으로 19연대 2대대가 사단장의 명령으로 옥천으로 후퇴했다가 대전역으로 복귀한 후 34연대장의 명령으로 유천동에 대대본부를 두고 가수원교를 지나 계백로를 따라 서대전분기점 근처 구봉산 지역까지 진격했다가 다시 도솔산측으로 후퇴한 정황과 연계가 되어 있으며 한 미군병사가 찍은 가수원교 주변 기관총 진지 사진과도 연계되어 있다.
오르는 중간에 큰 개 2마리를 데리고 내려오는 아주머니와 만나 도솔산의 자연공원 지정 해지에 따른 문제점과 큰 개를 데리고 산행하면서 주민들이 입마개를 채우지 않했다 하여 신고를 당하는 어려움에 대하여 들었다. 특히 적당히 운동시키고 잘 대하여 주면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는 말은 일리가 있었다. 지도상으로는 단순하게 생각했던 산능선과 봉우리가 실제로 오르면서 3개의 능선으로 갈라지면서 다리를 내려다볼 수 있는 봉우리를 찾기 위해 각 능선별로 헤매면서 확인하였고 결과적으로 주변 능선으로부터 가수원교를 감제할 봉우리는 없으며 가수원교 기관총진지는 잘못된 사진으로 우리도 확신하게 되었다. 가수원교 북측으로 뻗은 도솔산은 공주와 유성으로부터 연결된 계룡로와 접한 월평공원 끝자락까지 150m 표고를 유지하며 약 5km 능선을 이루고 있는데 34연대 1대대만 북쪽 능선에 진을 치고 있어서 북한군이 쉽게 남측 능선 도솔산으로 우회 침투하여 대대본부와 박격포진지 및 둔산지역의 당시 군사공항인 대전공항을 공격할 수 있었고 1950.7.20 오후에 공항을 수비하던 미 3연대에서 도솔산으로 추가적인 침투를 막기위한 반격작전을 펴기도 했던 장소였다.
탐방을 마진 후 1300 경 통영에서 산 특사품 꿀떡으로 점심을 대체하 였고 대전IC로 진입하여 경부고속도로를 주행하였다 서울에는 1730 도착하면서 낙동강전선 탐방겸 하기 가족여행을 5박6일 일정으로 마치게 되었다.
At about 13:00, we ended our exploration of 5 days and returned back home at about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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