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초기 위기의 낙동강 전선 전투지 탐방 Exploration of The Nakdong River Defensive Line in Korean War(2022.7.25-30)

625 전쟁은 불과 70여년 우리 /부모님 인권을 말살하고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및 전체주의 독재로 부터 자유 민주주의와 자유를 구한 것이었다물론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신앙의 자유언론의 자유집회/이동의 자유 등을 보장하는 대한민국 헌법아래 자유롭게 경쟁하며 행복을 추구하되 각자의 자유에 따른 행위에 대한 책임도 진다는 가치관과 사회적 규범을 갖고 60평생을 살아왔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또는 자유는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라는 격언은 우리가 지나온 시절에 어떻게 자유와 민주주의가 위태로웠고 또 어떻게 지켜 나가야 하는지 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 

지난 수 년간 헌법에 반하는 가치관적 혼동이 우리 모두를 불안하게 하였기에 우리의 /부모님과 대한민국이 625전쟁 참화 속에서 어떻게 대처하였고 우리의 혈맹인 미국은 급박한 시기에 어떻게 희생을 감내하였으며 UN 공산주의의 도발에 맞서 무슨 결정을 하였는지 되새겨 보며 올바른 가치관을 회복하고자 선조들의 지혜를 구하고자 하였다

마치 전쟁기념관에서는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1주회 1회씩 5주간 특별 강연을 실시하였고 나와 우리집 사람은 매주 참가하게 되었다강연주제인 낙동강전선의 사투와 의의중공군의 항미원조 참전 공격작전 미래의 북한 대처전략 수강하며 체계적으로 전쟁사를 이해하게 되었고 특히 낙동강전선의 사투와 8군사령관 Walker장군의 위기상황에서의 지휘가 있었기에 공산화되는 길목에서 625전쟁에 대한 휴전과 자유대한민국으로 존속할 있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평소 강연과 관련되는 전사에 대한 정보를 다시 한번 숙지하면서 1950 6월부터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된 1950 9월까지 노도와 같이 밀려 드는 북한 붉은 군대의 군화발에 짓밟히는 풍전등화와 같았던 국가의 운명을 구한 낙동강전선의 사투 현장을 직접 탐방하며 장소에 있었던 국군과 이억만리 바다 건너 참전한 미군 용기와 희생을 기리고자 계절적으로 당시와 유사한 2022 7 주간 탐방계획을 기획하고 실시하였다.  

I am very pleased to share my trip experience of the Nakdong River Defensive Line with you for the commemoration of the Korean War and for the sacrifice of our ancestors for our freedom and peace. It is important reminding that we have a debt to our heroic ancestors, so we have to transfer the free democracy and peace for our descendants.

It took 6 days for the trip with the budget of KRW 600,000. It took total 750 km drive to drive my own sedan along the points of the delaying actions and for the defensive river line of the Nakdong-gang, “General Walker’s Stand or Die”.

 The Korean war had a meaning to save our free democracy and people from the communist and its dictators who ignored the human rights and individual freedom, 70 years ago.

We had got along to enjoy our freedom of religion, speech, demonstration and transportation under our free democratic constitution, pursuing freely for our happiness and taking responsibility for the result of our behavior for over 60 years.

We needed to remind of the slogan that is Freedom is not free or freedom and free democracy can grow with the blood from the fighting against dictator. We needed to observe our politicians and their legislative campaign for prevention of their hypocritical cheating.

So, I wished to remind of our alliance of the U.S.A, the UN, and our ancestors that how did determine, fight and take sacrifice for the aggression of the communist, and I wished to get a heritage from them. Meanwhile, the Korean War Memorial Hall held the training session on Korean War for 5 weekends, and I and my wife had appreciation to participate in the sessions dealing with the fighting along Nakdong River Line, Chinese engagement, counterattack of the UN, and strategy of the war.

Realizing it was vital to block the communist advance and to end the war that our ancestors struggled to keep the Nakdong River Line from the feet of the communist forces, I persuaded my wife to explore the Defensive Line of Nakdong River, hoping to facilitate an experience to be on the sites in the critical times.

1.    2022.7.25 서울에서 대전 이동대전1(Toyoko-inn 대전정부청사On the date of July 25, to Taejopn from Seoul
















                                           














 24사단은 전쟁초기 1950.7.5 Smith 대대를 급파한 탱크를 앞세우고 전격적으로 남하하는 북한군을 막기 위해 잔여 병력이 선발로 파병되어 오산전의조치원천안 금강전투를 치루며 지연전을 수행하며 사단병력의 2/3 손실한 상태로 대전전투에 임하게 되었다대전전투는  8 사령관 Walker장군의 요청에 따라 증원병력인  1기갑사단의 영동지구 배치를 위해 대전방어를 연장하며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특히 19연대가 금강전투에서 손실이 발생되어 2 연대인 21연대와 34연대를 대전 북방과 서측 갑천에 배치하려던 당초 계획을 변경하여 34연대로만 시내를 방어하도록 배치하였다. 21연대는 연동의 사단본부 전방 옥천에 예비대로 배치하였다. 1500-1600  24사단 34연대  19연대가 1950.7.19-20 오전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하고 보문산 등으로 후퇴한  34연대 예비대인 3대대 지원포대가 1950.7.20 1차적으로 옥천방향으로 철수를 시도하다 길을 잃어 진입하게 대전여고 탐방 학교 근무하시는 분과 전사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At about 13:00-13:30, we arrived at the park located in the north parking lot of Pomun Mountain and had simple lunches packed in Seoul. We drove along the mountain road to the outdoor theater and parked my car. At about 1500, we worshiped at the monument of Taejon District Battle and the monument of the UN for Taejon Battle. 

At about 15:00-16:00, we drove to the Taejon Girl Highschool to which the 3rd battalion of the 34th regiment of the 24th division had lost the retreating way and came under the Noth Korean fires, and we talked for a while with the security man about the battle situation. The battalion was the reserve unit of the 34th regiment defending the Kap Creek and Dosol Mountain to Nonsan, and Wolpyong-dong to Yousong. It was the main force to defend the city because the 19th regiment was weakened severely at the previous battle, and the 21st regiment was placed rear in Ockchon as the reserve unit of the division.              


여기서 미군들은 차량을 포기하고 인근 대전대가 있는 야산으로 각개 대피하여 후퇴를 도모하였다 분은 국방관련 전문기관에 오랫동안 근무하다 전역 학교에 활동 중이며 독도법 인근 전사정보를 탐방객에 전수했다 한다. 2차적으로 철수를 시도한  24사단의 철수경로를 탐방하고자 1600-1900 대전여고를 출발하여 판암IC에서 세천공원과 당시 Tunnel까지  4 국도로 주행하며 1950.7.20 저녁과 밤사이 벌어진 죽음의 후퇴로를 탐방하였다그리고 식장산문화공원(세천공원) 전망대까지 산길을 주행하여 정상에서 대전에서 옥천방향  24사단 철수경로인 죽음의 골짜기를 조망하였다.

Here at this school, the American troopers gave up their vehicles and fled into the nearby mountain, evacuating on walk to Ockchon in groups.

At about 16:00-19:00, We departed from the high school and drove the distance between the Panam IC and Saechon Park & Tunnel to explore the main withdrawal road of the division. The withdrawal had been carried out on the late evening of July 20, 1950, but become a bloody Death Valley for the American troopers. We could drove along the winding mountain path to the observatory pavilion on the Sikjang Mountain Culture Park(Saechon Park) where we could look down the valley stretched through Taechong Reservoir to Okchon. Refer to the below photo for the view of the valley from Sikjang Mountain Culture Park.
























세천 Tunnel 현재 폐쇄되어서 위치를 찾고자 동구 세천동 세천체육공원 세천역 주변을 탐방하며 궤도흔적은 찾았으나 Tunnel 발견할 없어 철거된 것으로 추정하였다여기서 92 드신 625 목격한 노인분을 만나 세천역 위치 당시 인근 정황을 여쭈어 보았고 미군기의 인근 폭격 정황 위치에 대해 알려 주었다 분은 당시 북한군에 의해 끌려가지도 않고 국군에 의해 징집되지도 않아 이상하게 생각되었으나 현재 대청호 남단 이곳 옥천지역은 대청댐으로 수몰되기 금강에 연한 골짜기이며 현재는 비룡분기점 근처이나 당시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아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하셨다.  그러나 2 철수대열을 이끌던 Dean 소장( 24 사단장) 그의 참모가 인동사거리에서 적의 사격으로 타고 있던 Jeep 돌리지 못하고 금산방향으로 달려 내려가는 바람에 보문산과 식장산 사이 가오동의 산내초교 근처에서 도로를 막고 사격하는 북한군을 피해 도피한 인근 강바위산은 날이 어두워 탐방을 하지 못하였다.

It was hard to identify the Saechon Tunnel regarded to be closed down around the Saechon station, and we could identify the only trails on which rails had laid at that time. We had opportunity to meet the old man who was 92 years old and had been there in the war, explaining about the tunnel location and the bombardment points of the American Shooting Stars. He told us that this Ockchon area had not been destroyed severely because of a retreated place in the valley of Kum River not merged into the current Taechong Reservoir. But it was so late that we could not explore the mountain of Kangbawi- Mountain near Sannae Primary School between the Pomun Mountain and Sickjang Mountain, into which General Dean and his staffs on jeeps had been shot and hid hurriedly. 

2.  2022.7.26 대전에서 대구 이동대구 1(Toyoko-inn 대구 동성로On the date of July 26, Taegu from Taejon

대전 정부청사 호텔에서 0830 출발하여 대전IC 진입하여 경부고속도로  1시간 주행하여 황간IC 나와서 영동황간로 상에서 서쪽으로 주행하니 노근리평화공원에 도착하였다.  

We kicked off at 08:30 from Taejon and came into the Taejon IC to drive on the Kyungbu Express Way. We drove out of the Hwanggan IC for Nogun-ri Peace Park and arrived after 1 hour drive. 






















주차장에 차들이 거의 없어 한가한 분위기였고 공원은 방문자센터위령탑 평화기념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기념관을 둘러 쌍굴다리를 찾았다 다리는 한군전쟁 초기인 1950.7.26-29 까지 4일동안 공군기와  1기병사단(7연대 2대대소속 미군 사격에 의해 수백명의 주곡리 임계리에 살았던 무구한 피난민이 희생된 장소이다종북 반미세력들이 노근리 사건을 미군에 의한 학살로 악용하는데 따른 문제도 있지만 보수적 관점에서도  전쟁 초기 남의 나라를 지켜주기 위해 갑자기 한국에 파병되었다가 대전과 영동에서 북한군에 의해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전쟁의 실상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미군들이 지레 겁을 먹고 과도하게 사격 작전을 실시한 비극적이고 우발적 사건이 발생된 종전이 되고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국가에서 억울한 피해자와 가족들을 구제하지 않고 상당기간 고통과 원한속에 방치한것은 국가적으로 정의롭지도 현명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쌍굴벽에 총탄자국이 선명하게 있는데 하얗게 식별표식 하였고 숫자가 표식되어 있었다사건 당시 7월의 땡볕아래 무차별 사격에 내몰린 피난민들의 살과 피가 찢기고 튀는 공포가 그대로 느껴졌다쌍굴을 통과하여 황간측 동쪽방향에서 인접한 산길을 오르니 쌍굴 후방이 보였고 역시 피탄흔적이 보였으며 전망대로 이어지는 길이었고 희생자 위령비가 세워져 있었다평화공원을 가로 질러 서송원천이 쌍굴  쪽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고 우리는 다시 기념관 쪽으로 돌아와서 쌍굴 맞은편 야산근처까지 접근하여 2대대가 능선상에 진을 치고 사격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확인했으며 쌍굴에서 맞은편으로 330 m 떨어져 있었다.   노근리평화공원 쌍굴탐방을 마치고 1300 영동군 용산면 상용리 방향으로 주행하여 용암리 마을 보건소 근처에서  27연대 1대대가 영동의 1기갑사단의 후방 퇴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긴급 출동했던 지역을 탐방하였다.

We visited the Visitor Center, Memorial Monument, Museum in the park and the Twin Tunnel. This tunnel was the place that 400 refugees from Jukock-ri and Imgae-ri of Hwanggan were shot, during July 26 to July 29, 1950, to death by the troopers of the 1st Cavalry Division in the time of imminent danger of North Korean’s round up. After the fall of Taejon, the new division was hurriedly placed in this area to cover the annihilated the 24th Infantry Division, and it was heard that the North Korean Agents were disguising in the refugee for their ambush. We investigated the bullet marks on the wall of the tunnel, the mountain side of the back of the tunnel where the memorial monument of the sacrificed refugees was erected. We also investigated the mountain ridge supposed to be the defensive line of the 2nd Battalion of American Force, 300 meters off the tunnel.

At about 13:00, we drove toward Sangyong-ri, Yongsan-myon, Youngdong to the area, near the village health center, where the Colonel Michaelis’ Force dispatched to block the North Korean’s Advance. Refer to the below photo for the scenery of the village health center.  
























지역은 북한군 2사단이 영동 동측으로 우회하여 황간을 점령하고 후방 퇴로를 차단하여  1기갑사단을 전멸시키고자 지역으로 황간 고지대의 2대대  27연대본부(다부동 전투에서 국군 1사단을 지원하고 영산지구 마산의 진동리 전투 낙동강전선에서  8 예비대로서 취약한 전선의 기동타격 역할로 알려진 Michaelis 대령이 지휘측으로 축차적으로 후퇴하여 북한군 2사단을 1950 7 23일부터 29 사이 진격을 저지시킨 작전이었다황간 전투지역에서 1330 다시 노근리평화공원으로 돌아와 황간IC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남구미 IC에서 나와 왜관에 도착  B29 100 폭격기에 의한 낙동강 서안 칠곡군 약목 융단 폭격지역 맞은편 낙동강 동안 칠곡보 근처 왜관지구전적기념관을 둘러 보았다.

In this area, North Korean Force was ambushed and destroyed during July 23 to July 29, 1950, that they could not cut the rear route of the 1st Cavalry Division in Hwanggan.

At about 13:30, we entered through the Hwanggan IC to the Kyungbu Express Way and drove out of the South Kumi IC to the area of Yakmok in Chilgock bombarded heavily by 100 American B-29 Bombers. We also dropped by the battle memorial hall of Waekwan District.     



































그리고 작오산을 북쪽으로 우회하여 왜관 북방의 작오산(303고지) 점령한 3사단의 일부 병력이 이곳을 지키던 5기병연대 소속의 박격포 소대 소대원 26명을 포로로 잡았다 학살한 작오산 근처 한미우정의 공원을 탐방하였다.

At about 16:00, We departed from Jacko Mountain and drove along the valley between Suam Mountain and Youhak Mountain to visit the Battle Monument of Dabu-dong and the battle place of the Bowling Alley in Cheonpyong Valley. Colonel Michalis’ 27th Regiment supported General Paik’s 1st Division in this valley to block the strong attack of the North Korean Tanks for their occupation of Taegu. Refer to the below photo for the entrance of Cheonpyong Valley featured from the battle monument of Dabu-dong.  

After visiting the memorial hall in Waekwan, we detoured north of Jacko Mountain(Hill 303) to come to the Park of Korea-American Friendship where 26 Cavalry Troopers had been caught up and killed by North Koreans in the initial process of Nakdong-gang Defensive Battle. They were disguised by the North Korean Wireless Radio that ensured them in English to be evacuated by a friendly South Koreans. Refer to the below photo for the Park of Korea-American Friendship.























미군들은 인근 국군이 구출하러 온다는 거짓 무전에 속아서 위장한 북한군에 잡혔다 한다. 1600 작오산 탐방을 마치고 수암산과 유학산 남단 계곡사이 국도를 타고 동쪽으로 주행하여 다부동 전적기념관(유학산과 가산사이 가산면 금화리 126-2) 북측으로 Michaelis 대령이 이끈 27연대 전차부대의 천평계곡(Bowling Alley)  탐방하였다

 
















 



 3. 2022.7.27 대구에서 창원 이동창원 1(Toyoko-inn 창원On the date of July 27, Changwon from Taegu          

08:45 대구 숙소 출발 옥포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지선으로 미국 감리사   설계한 국내 2번째 고속도로) 타고 현풍휴계소에서 들러 Coffee한잔하고 주변의 500 나무를   09:30 오항 북단의 진창리 용석촌이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차를 데고 걸어서 야산을 넘어 강변으로 남측으로 오항측 북한군 도강지점과 북측으로 부곡리 도강지점을 확인하고자 하였으나 강변 나루터 추정지역에 농업용 배수장이 설치되어 도로가 차단되어 강변만 확인하였다.

At about 08:45, we drove the Inter-continent Expressway, designed by an American Supervisor as the 2nd Pavement of the Expressway in Korea, through the Ockpo Junction and dropped by the Hyunpung Service Area, looking at the 500 years old tree with a cup of coffee. At about 09:30, we drove off the Changryong IC and drove to the point where the creek of Yongsok-chon is merged into the River of Nakdong, parking and walking into the riverside forest to explore the river crossing point of North Koreans in Ohang village. But it was impossible to be close to the point due to the agricultural facility of water supply, but only possible to observe the river and its riverside in distance. Refer to the below photo for the access path to the facility and river.  
















1030 출발하여 1100 박진 전적기념관 도착 참관한 주변 야산에 설치된 박진지구전적비를 참관하였다비문에는 “이곳에서 24사단 2사단그리고 미해병 5연대(1사단) 보여준 百折不屈(백절불굴) 투혼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것이니…”라고 쓰여 있다.

At about 11:00, we drove and arrived the Monument Hall of Pakjin District, paying our respect to the monument in a mountain side. It was written on the monument that Republic of Korea was due to the never yielding fighting spirit of the 24th American Army Division, 2nd  American Army Division & 5th American Marine Regiment.  Refer to the below photo for the Monument Hall of Pakjin District. 














1330 1950.8 창령영산지구 전투가 가장 심하게 벌어진 고운봉 주변 200m 고지군으로 형성된 Clover Ridge 남측으로 뻗은 오봉리 Ridge 접하는 고곡리와 마을에서 북서쪽으로 오항 가는길을 탐방했으며 도로를 통해 맞은편 강변 합천/의령측에서 도강한 북한군이 주요 교두보 확보를 위한 이동경로로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나루터가 없어져 사용되지 않는 소도로이다. 아래 사진에서 우측 강변은 부곡리로서 21연대에 의해 도강이 저지되었으나 좌측 강물이 굽이쳐 우측으로 내려가는 정면 계곡사이 오항으로 북한군이 대거 도강을 하였다.  

At about 13:30, we explored the area of Kokok-ri, where the mountain ridge of Obong-san and Clover were butted with, and the path of Ohang stretched northwestward from the village. This small path not used nowadays was a main advancing route for the North Koreans crossing the river from Hapchon and Euiryong. 














박진교를 건너 박진마을회관근처에서 강변 둑박길로 올라 차를 세운 북한군 중점 도강지역인 박진교 주변 강변을 확인하였고 맞은편 박진지구전적비가 멀리 보였음 지역에서 북서쪽으로 5km 정도 떨어져 의령군 부림면 신반리에는 낙동강을 도강하여  24사단을 공격한 북한군 4사단 사령부가 있었고 9 2 공격 24사단과 교체한 2사단을 창녕군 현창리 부곡리쪽으로 공격한 9사단 사령부가 합천군 초계면에 있었다 한다. 아래 사진은 북한군측 입장에서 도강할 전경이며 강뚝 아래로 나루터가 있었다 추정되고 건너 박진지구가 보인다

We crossed the river through the bridge of Pakjin and parked on the riverbank, observing the riverside and the monument of Pakjin in long distance. Not far from here, it was told the Head Quarter of North Korean 4th and 9th Divisions had been established in Sinban-ni of Purim-myon of Euiryong. Refer to the below photo for the scenery of the riverside of the Pakjin Bridge on the opposite side of the monument.














1500 오봉리 Ridge 출발하여 남지교를 경유하여 진주에서 유입되는 남강을 따라 우측으로 길을 타고 주행하여 함안을 거쳐 서북산과 대부산으로 가로막힌 계곡 끝단 별천계곡에 1630 도착했다남지교는 창령영산전투 함안 남단의 여항산과 서북산에 거점을 북한군의 주요 침투지 가운데 하나이며 당시 영산까지 침투당한  24사단 34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긴급 출동한  8 예비대로 있던  25사단 27연대의 반격작전 도강한 경로이기도 하다.

At about 15:00, we kicked off the ridge of Obong-ni and crossed the bridge of Namji. We were driving south on the road by the river of Nam River flowed from Jinju and arrived the valley of Byol Creek between the Mountains of Seobuk and Taebu at about 16:30. The bridge was used, as a main attacking route for Youngsan, by the North Korean Force dominating the Mountains of Seobuk and Yoihang. It was also used by the 27th American Regiment of the 25th Infantry Division, the single reserve force of the 8th US Army called upon immediately to fight in Yongsan.       


별천계곡에는  25사단 5연대전투단 1대대 중대장으로 복무하다 인근 서북산 전투에서 1950.8.23 전사한 Timmons 대위의 흉상이 세워져 있고 희생없는 자유는 없다라는 말씀이 새겨진 625 월남전 참전기념비가 세워져 있다다음 탐방했던  27연대 본부 전투지였던 진동초교와는 남으로 79 국도를 따라 20 km 떨어져 있으나 별천계곡은 국도에서 갈라져 지방도로로 접근이 가능하였다낙동강이 남지교에서 동쪽인 부산쪽으로 굽어져 흐르기 때문에    낙동강 돌출부 남쪽에 있는 함안은 서북산과 여항산과 연계하여 마산으로 남북으로 연결되는 낙동강 전선의 최후의 저지선이기도 험악한 산악지대이다 


마산창령지구가  24사단의 방어지역이었다면 지역은  25사단의 방어지역이었으며 Walker 장군은 1950.7 당시 북한군이 호남을 경유하여 진주를 경유하여 김해를 거쳐 바로 부산으로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따라서 10 북한군 사단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병력을 고려하여 지역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고 강이 S자로 형태로 우회하여 흐르기에 유속이 낮고 수심이 낮은 박진지구 돌출부를 포함한 낙동강 전선 대구 북방 방어에 집중하던 중이었다.   8 사령관은 상주지역을 방어하던 25사단을 멀리 진주까지 긴급하게 투입하는 결정을 내리고 대구에서부터 열차로 병력을 이송하여 마산을 방어하였으며 추가적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본토로부터 증원된 해병여단  2사단을 추가 투입하여 1950.8 진주/사천까지 공격하는 작전을 지시하였다.

 At the valley of Byol Creek, the torso of Colonel Timmons of the 5th RCT of the 25th Infantry Division killed in action in the battle of Seobuk-san Mountain. This site was 20 km south off the primary school of Jindong.  General Walker thought that the North Korean Forces would not advance to this area, so he did not place his force around the area of Chinju and Masan. As this area was occupied by the North Koreans and the main port of Pusan was directly threatened, he ordered his 25th Infantry Division to board on the trains for Jinju and to block the enemy advance    He also put into this area, the new American forces of the Marine Brigade and the 2nd Infantry Division arrived in Korea. The Marine Brigade was originally reinforced for the landing operation of the Chromite in Inchon

4. 2022.7.28 창원에서 진주 이동_71km_진주 1박(뉴라온스테이) On the date of July 28, Chinju from Changwon

마산 숙소에서 1박한 조식을 하고 0830 출발하여 남해안대로를 타고 마산만을 지나 현동교차로 통과하여 1000 진동리 진동초교에 도착하였다

At about 08:30, we started from our accommodation in Changwon and arrived at the primary school of Chindong, driving along the South Seashore Road and passing by the bay of Masan and Hyondong Crossroad at about 10:00. Refer to the below photo for the school.  

 

주변 마을을 둘러보고 진동천을 따라 학교 뒷산인 255m 시루봉 고지와 맞은편 도곡리 99m 고지 진북면 이목리 야반산 고지도 확인하였다. 이들 고지는 1950.8.6-9 미해병 5연대가 마산에 대한 북한군 피탈의 위기에서 25사단 27연대 지역에 증원나와 이들 고지군을 공격 점령한 있으며  진동초교에서 1951.8.2  25사단 27연대와 북한군 6사단 침투부대간 전투가 있었으며 뒷산 작은 시루봉 고지에서 북한군의 증원부대 차량 행렬을 보고 포병대를 동원하여 크게 파괴하기도 하였다북한군 6사단은 국공내전을 치룬 조선족으로 구성된 부대로서 김일성이 부산의 측면을 찌르는 기습부대로 활용하고자 예비로 두었던 부대였으며 진주 점령  부산 점령을 위한 마산 공격을 시작하였다선두부대는 이미 중암리와 진동리로 진출하였고일부 부대는 함안 남쪽 서북산  25사단의 후방지역으로 침투하여 기존  25사단과 본토에서 증원된 해병여단  5전투연대로 전력이 보강된 Kean 특수부대의 진주탈환을 저지하고 있었다. 1100 진동리를 출발하여 서쪽으로 진곡면 임곡교차로까지 가서 북서쪽으로  2 국도를 타고 1130 봉암리에 도착하였다.

We explored around the village near the school, and the Summit of 250-meter-high Siru. On the date of August 2, there was a big battle between the 27th Regiment of American 25th Division and the North Korean 6th Division on the playground of this school. The North Korean Division was composed of the Korean Chinese Troopers engaging the Chinese Civil War between Mao and Chang Regimes and designated as a reserve force to ambush at a critical time. This division had advanced the Province of Cholla and advanced invisibly up to Jungam-ri and Chindong-ri of the rear of the American Forces after occupation of Chinju.

At around 11:00, we drove west from Chindong-ri to the crossroad of Imgok in Jingok-myon and then drove north to arrive Pongam-ri at about 11:30 for excursing, so called, the Grave of  American Artillery. Refer to the below photo for the valley of Pongam-ri.  

 

봉암리는 포병의 무덤으로 비극적 장소로 알려져서 탐방하였는데  5전투연대에 소속된 지원포대가 1950.8.11 봉암리 계곡에서 철수 북한군에 포위되어 전멸된 장소였다양천리 대청마을과 진전천 주변을 도보로 걸으며 사방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내 죽어간 포병대원( 본토에서 이억만리 바다건너 투입된 젊은 병사들) 생각해 보았다좁은 계곡에서 철수 소속한 보병들의 지원포대 엄호에 문제가 있었다 생각이 되지만 포병 본인들도 적의 공격을 받을 즉각 보병과 같은 임무로 전환하여 자체적으로 방호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사건으로 사천까지 진격했던  5 해병연대 일부 병력을 긴급 차출하여 1950.8.13 봉암리 진천천에 연한 능선으로 구출작전을 전개하였다계곡 탐방을 마치고 1230 봉암리계곡을 빠져나와 1300 남서쪽으로 14 국도를 타고 주행하여 배둔리에 도착하였다

This area was told that an Artillery Unit of the 5th Regiment Combat Team was surrounded and annihilated by the North Korean ambush in the process of its withdrawal on the date of August 11, 1950. We explored the village and creek in this valley and thought of the young American Troopers who couldn’t defend themselves but die. This incident called upon the American Marine Brigade to stop advancing toward Sachon but to save the artillery. 

At about 12:30, we drove out of the Grave of American Artillery and arrived in Paedun-ni at about 13:00. Refer to the below photo for the ridge of Paedun-ni.  

 





















배둔리는 해병여단이 마산 진동리 고지에서 북한군을 격파한 사천을 향해 진격 저지하는 북한군과 교전을 치룬 장소였다.  1400 고성에서 점심을 먹고 북서쪽 사천공항 방면으로 뻗은 33 국도를 타고 주행하여 1600 사천시 정동면 근처 야산의 고지군에 도착하였다.

This place was the battle place between North Koreans and the American Marines advancing toward Sachon after defeating a North Korean Unit in Dabu-dong. We had a lunch at Kosong and drove north-west on to arrive in the ridges of Chongdong-myon of Sachon at about 16:00.

 

해병대의 당시 작전도를 참고하여 위치가 북한군이 진격하는 미군을 상대로 학익진 형태로 방어하며 화력을 집중시키지 않았을까 추정하였다사천점령을 목전에 두고 전투에서 해병은 자체 F4-U Corsair 전투기를 동원하여 폭격도 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8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지역 구출작전(1950.8.11-12새벽 발생된  5전투연대 지원포대가 마산 봉암리 계곡에서 전멸되었다.) 위해 긴급 철수명령을 받고 철수하던 실종된 전우를 찾지 못하고 남겨두고 명령에 따라 떠나야만 하는 해병의 슬픔에 대한 기록도 있었다 해병의 신조는 전투 동료 해병을 죽든 또는 부상을 당하든 절대로 적진에 홀로 남겨두지 않는 것이었다 한다지형을 살펴보니 해병대의 진격로는 보다 내륙에서 진주로 진격하는  25사단이나 5전투연대보다 남해안 도로에 연한 산악지형이 마산의 진동리 고지군을 제외하고는 상대적으로 위험해 보였고 그래서인지 진격속도도 훨씬 빨랐다 한다탐사를 하는 동안 차량은 사천공항에 가까운 노천마을회관 사천강변에 주차해 놓았고 강뚝을 따라 계곡에 연한 산능선을 확인하였다사천에서 진주방향 북쪽으로 2 국도를 타고 화개교차로에서 동측으로 3번국도로 갈아타서 진주고개 전투지에 도착하였다

In accordance with the operational map used by the American Marines, we were supposed to locate the battle point which was a valley surrounded by the mountains. During the battle, the Marine Brigade was ordered to withdraw for the rescue operation. They had to stop their fierce attack under support of their Colsaire bombing and move to the valley of Pongam-ni, the Grave of American Artillery. After parking at the riverside of the Creek of Sachon near the Community Center of Nochon Village, we explored the battle valley and creek surrounded by the mountains. 

 


 






















고개는  27연대 1대대가 마산에서 혈전을 치루면서 진주까지 북한군 6사단의 주력 소재를 파악하고자 전차를 앞세운 위력정찰 지역이며 북한군의 공격으로 전차와 차량이 파괴되고 주변의 북한군에 포위될 위험성이 있어 남서쪽의 진동초교로 복귀를 시작한 장소이기도 하였다북한군은  1대대가 진동초교로 복귀한 사실을 모르고 진동초교에 있던  27연대 본부를 기습하려다 크게 격퇴당했다. 1830까지 진동리에서부터 진주고개까지 탐방을 마치고 진주의 숙소로 복귀하였다.

On this pass, the 1st Battalion of the Michaelis 27th Regiment was patrolling with their tanks to locate the main force of the North Korean 6th Division and withdrew, when they were attacked, and some tanks were destroyed, back to the Primary School of Chingdong where they defeated North Koreans.

 5. 진주에서 통영/대전 서울귀경

5-1, 2022.7.29 진주에서  대전이동_대전1(Toyoko-inn 정부청사On the date of July 29, Tongyoung from Chinju   

-        해병대 통영 상륙작전기념관김성은 중령 한국해병 1대대

-        통영 시내관광통영 Cable Car 탑승동양 Naples (해저Tunnel, 충무교 운하h

-        이순신 공원한산대첩 현장

We visited the Monument Hall of the Tongyoung Landing Operation of the Korean Marines and toured to board on the cable cars and to stroll in the park of General Lee SunShin. 

5-2 2022.7.30 대전 서부지역 탐방 귀경 On the date of July 30, Taejon from  Tongyoung

-  후기:  대전의 숙소에서 제공되는 조식을 들고 0845 출발하여 가수원교 근처로 주행하였다당초 대전전투와 관련 낙동강전선 여행 첫날 옥천방향의  24사단 죽음의 철수지역  동부지역을 탐방하였다면 마지막날 금번 대전 탐방은 서부지역 갑천에 연한 원평정수장도솔산과 가수원교를 계획하였었다그러나 도솔산 북단 원평정수장 지역은   전에 탐방한바 있어 이번에는 남서쪽 논산쪽에서 올라오는 북한군을 대적하기 위한 계백로상의 가수원교  인근 전투지역을 보다 중점적으로 탐방하였다.

We explored the bridge of Kasuwon at the south end of the Mountain ridge of Dosol. It was existed in the war and linked with the main road to Nonsan. It was important to defend the western inlet of Taejon. The battered American 19th Regiment was called from Ockchon by General Dean to reinforce the 34th American Regiment in response to the appearance of North Koreans. They advanced to the area of Guchon-dong near the interchange of West Taejon and fought back to Chonju later. We explored the point of the automatic rifle emplacement to cover the bridge as taken in the photograph by a journalist. But we realized it was not the point as we couldn’t secure the scenery at the point. Later, it is known to be taken the emplacement in the Sangju in the area of the 25th Infantry Division supporting South Korean Forces. Refer to the below photo for the bridge and the machine gum emplacement.               






















그러나 도솔산 진지  유성과 연결된 만세교와 계백로에 연한 도솔산 월평공원 진지에서 후퇴했던  34연대 1대대  가수원교 서측을 방어하기 위해 긴급 투입되었다 격퇴당한   19연대 2대대의 보문산 진입로로 추정되는 오월드네거리-오월드-사정공원대전보훈공원 탐방  보문산 산허리 대별동에서 북한군 유격대와 총격전을 벌인  34연대 1대대가 무수동에서 산성  19연대 2대대의  중대와 합류 전주로 탈출한 지역에 대한 탐방은 시간이 부족하여 포기하였다가수원교는 논산으로부터 진격해오는 북한군을 저지할  있는 중요한 지점으로 19연대 2대대가 사단장의 명령으로 옥천으로 후퇴했다가 대전역으로 복귀한  34연대장의 명령으로 유천동에 대대본부를 두고 가수원교를 지나 계백로를 따라 서대전분기점 근처 구봉산 지역까지 진격했다가 다시 도솔산측으로 후퇴한 정황과 연계가 되어 있으며  미군병사가 찍은 가수원교 주변 기관총 진지 사진과도 연계되어 있다.

 






























특히  사진은  시민단체가 확인한  가수원교가 아닌 문경의 25사단 진남교반 토끼비리 기관총진지라고 밝혀 관심이 있던 장소였다이미 문경 탐방  토끼비리의 진지를 확인했기에 이번 탐방에서 비교 확인을 위해 가수원교와 인접하여 다리를 내려다   있는 도솔산 남쪽 끝자락 산봉우리를 찾아 올랐다차량은 가수원교 주변 도솔산 자락 공터에 두고 자동차정비소가 있는 장소에서 산길을 발견하여 올랐다.

 
























오르는 중간에   2마리를 데리고 내려오는 아주머니와 만나 도솔산의 자연공원 지정 해지에 따른 문제점과  개를 데리고 산행하면서 주민들이 입마개를 채우지 않했다 하여 신고를 당하는 어려움에 대하여 들었다특히 적당히 운동시키고  대하여 주면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는 말은 일리가 있었다지도상으로는 단순하게 생각했던 산능선과 봉우리가 실제로 오르면서 3개의 능선으로 갈라지면서 다리를 내려다볼  있는 봉우리를 찾기 위해  능선별로 헤매면서 확인하였고 결과적으로 주변 능선으로부터 가수원교를 감제할 봉우리는 없으며 가수원교 기관총진지는 잘못된 사진으로 우리도 확신하게 되었다가수원교 북측으로 뻗은 도솔산은 공주와 유성으로부터 연결된 계룡로와 접한 월평공원 끝자락까지 150m 표고를 유지하며  5km 능선을 이루고 있는데 34연대 1대대만 북쪽 능선에 진을 치고 있어서 북한군이 쉽게 남측 능선 도솔산으로 우회 침투하여 대대본부와 박격포진지 둔산지역의 당시 군사공항인 대전공항을 공격할 있었고 1950.7.20 오후에 공항을 수비하던  3연대에서 도솔산으로 추가적인 침투를 막기위한 반격작전을 펴기도 했던 장소였다.

탐방을 마진  1300  통영에서 특사품 꿀떡으로 점심을 대체하 였고 대전IC  진입하여 경부고속도로를 주행하였다 서울에는 1730 도착하면서 낙동강전선 탐방겸 하기 가족여행을 56 일정으로 마치게 되었다

At about 13:00, we ended our exploration of 5 days and returned back home at about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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