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후퇴 후 반격작전 시 쌍굴전투지역(Battle of the Twin Tunnel) 탐방

2020.11.29() 주말을 맞아 계획했던 집사람의 김장 담그기가 끝나고 집안일도 끝냈기에 오전 10 Youtube로 예배를 보고 10시 반에 1951 1월 말 치열했던 쌍굴전투지역을 탐방하기로 했다. 이 지역은 지평리 전적지 근처에 있으며 지평리를 여러 번 방문했으나 깊이 있게 보지 못했던 지역으로 용문역 근처 공영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오후 2시 경 근처에서 점심을 마친 후 집중하여 탐방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송파에서 강변북로와 연결되는 양평가는 6번 국도를 타면 가장 좋으나 일요일 오전 항상 교통체증이 있어 다른 경로를 택해야 했다. 우선은 하남방향으로 가서 남한산성 입구로 이어지는 43번 국도를 타고 남하하여 광주IC 못 미쳐 상번천리 삼거리에서 88번 도로를 타고 북상하다 퇴촌방향으로 동진하여 경안천을 지나고 퇴촌을 지나 해엽산을 넘었다. 여기서 부터는 남한강 남단 도로를 타고 동진하다가 양근대교를 건너 양평을 지나 6번 국도를 타게 되었고 이 후 교통체증 없이 시원하게 횡성/홍천방향으로 양문까지 달려 도착하였다.

실제 용문에는 오후 1시 도착했으나 식사장소를 찾으며 주변을 둘러 보느라 1시간 정도 경과했었다. 특별히 어제 저녁에 TV에 소개되었던 용문 된장솔잎칼구수집을 찾았으나 워낙 손님이 많고 조그만한 식당안이 가득차서 번호표까지 받았으나 포기하게 되었다용문역 공영주차장은 신용카드만 사용할 수 있으며 용문산 등방객이 많은 관계로 역사 근처가 혼잡하기에 차를 가져오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으며 1시간 무료이다.

용문에서 지평은 차로서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갈지산을 좌측에 끼고 고개를 넘으면 바로 지평면에 진입하게 되며 쌍굴 가기 전 지평리 전투 때 미 23연대 소속 프랑스 대대장이 사용하던 사령부 건물(지평막걸리 주조장)을 잠간 확인했는데 최근 건물을 증축한 것 같았고 전에 양조장 입구 좌측에 있던 대대 사령부 안내판이 보이지 않아 무척 아쉬웠다.

지평면사무소를 지나 동측으로 가다 보면 월산저수지에 이르게 되고 여기서 남측으로 뻗은 도로를 주행하면 지평리 전투 때 중공군의 주요 공격 거점이었던 배미산 자락에 있는 망미리의 석불역이 보이고 곧 이어 조그만 고개를 구불구불 넘어가면 무왕리에 있는 쌍굴이 나타나게 되었었다. 그런데 석불역과 구둔역을 잇는 궤도사이에 있었던 쌍굴이 잘 보이지 않았고 대신 태극기, 성조기 및 불란서 3색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국기봉 옆에 차를 데고 확인하니 쌍굴전투 기념비가 도로변에 조그맣게 그러나 새롭게 조성되어 있었다. 여기서 궤도를 살펴보니 멀리 쌍굴이 보이는데 각각 입구가 폐쇄되어 있었고 바닥의 궤도도 없어지고 흔적만 남아 있었다. 

(주차한 자동차 뒤로 Arch형 쌍굴이 보인다. 앞쪽 공터부터 길 건너 굴

입구까지 궤도가 있던 자리가 보인다.)


청량리 원주간 궤도 복선화 공사가 이루어 지며 석불역과 연결되었던 일신리의 구둔역은

폐쇄가 되고 대신 좀더 깊숙히 골짜기 안으로 일신역이 생겨 석불역과 연결되었다 

구둔역은 현재 유적지로 보존되고 있으며 주변은 영화 및 Music Video 촬영지로 소개되고

있다. 또한 양동역까지 구둔고갯길이 조성되어 산보할 수 있는데 기존의 궤도를 일부 살

려 놓아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문화재로 보호를 받는 구둔역사, 쌍굴 전투지역에 있었던 건물)


여기서 확인 한 쌍굴을 중심으로 1951 1 31일부터 2 1일 까지 치열한 쌍굴전투가 

미 육군 23연대와 중공군 4개 사단과 10:1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중심지이다

또한 전투가 있기 전 Ridgway장군의 뜻에 따라 서부전선에서 중부전선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이는 중공군(42)의 위치를 파악하고 지평리를 탈환하기 위한 정찰작전에서 역시 치열

한 전투가 있었던 지역이다

 

쌍굴전투를 이해하기 위하여 생생625에서 소개 되었던 지평리 전투의 배경을 다음과 같

이 전하고자 한다.

“1951.1월말부터 국군과 UN군은 연이어 계속된 Thunderbolt 작전과 Round-up 작전으로 전

선을 30~60킬로미터를 북상시켰는데, 사실 이런 가시적인 성과보다 중공군을 격퇴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하게 된 것이 더욱 고무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는 한편으로

지난 1.4후퇴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기간은 중공군이 보급을 받아 서서히 다음 공세를 준

비하고 있던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2월로 접어들면서 전선에는 중공군의 재배치를 위한

대규모 부대이동이 관측되기 시작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중공군의 재배치는 중부전선에서 UN군의 주력을 포착하여 섬멸한다는 중공군 사령관 

Peng의 복안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PengUN군 전선의 지평리와 횡성(삼마치고

)을 비교한 결과 기동력과 화력이 비교적 열세한 국군 제8사단과 제3사단이 배치된 횡

성을 먼저 공격한 후 이어서 미군이 배치된 지평리를 공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1951.2.11 20 30중공군 9개 사단으로 구성된 제13병단이 횡성 북방의 삼마

치 고개로 돌입하여 들어왔고 이곳을 담당하던 국군 제8사단은 급속히 무너져 내리기 시

작하였습니다. 흔히 2월 공세라고도 불리는 중공군의 제4차 공세가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국군 제8사단은 불과 4시간 만에 완전히 붕괴되었는데, 다음날 수습된 병력이 장교 263,

사병 3,000여명에 불과하였는데, 사망하거나 실종된 인원이 장교 323, 사병 7,142명으로

추산되는 사단 해체 수준의 엄청난 참패를 당하였습니다. 국군의 조기붕괴는 후방의 미군

지원부대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후방의 지원부대들에게 전방사단의 붕괴 사실이 뒤늦게

전파되었고 중공군의 진출이 빨라서 이들마저 순식간에 고립된 것이었습니다. 미군은 화

포와 차량 등 많은 중장비를 포기하고 산악능선을 따라 철수하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

니다.

 

결과적으로 중공군의 횡성전투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투입하여 공격 하루 만에 국

2개 사단을 격파함으로써, 전술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결과

에 따라 2 12일 정오, Ridgway 8군사령관이 원주의 중부전선 미 제10군단사령부를 

직접 방문하여 지평리-원주를 연결하는 새로운 방어선을 설정하여 이곳으로 부대를 철수

시킨 후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결과 지평리가 UN군 방어의 

중심지역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반면 중공군도 횡성에서의 승리가 전선 전체, 특히 한강 이남까지 올라와 있던 서부전선

UN에게 영향을 미치려면 그 연결점인 지평리를 확보하여야 했습니다. 

사실 중공군의 제4차 공세에 의해 미 제10군단이 원주로 후퇴하였기 때문에 지평리의 제

23연대는 순식간에 적 지역으로 돌출된 형국이었습니다. 때문에 여주 인근으로 철수하여

방어에 임하는것이 보다 합리적인 전략이었습니다. 하지만 Ridgway는 지평리가 서부전선

과 중부전선의 연결고리이며 중공군이 반드시 점령하고자 하는 전략적인 장소임을 인식하

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평리 전투 이전에 23연대 정찰대가 이 지역 쌍굴에서 겪었던 전투는 원작

Twin Tunnel Patrol Ambush에서 잘 기술되어 있어 다음과 같이 번역 요약하고자 한다.

“1951 1 29일 오전이 되어서야 정찰대가 이호리에서 결성될 수 있었다.

미 육군 2사단 23연대 1개 중대와 미 육군 24사단에서 차출된 1개 중대가 미첼 대위의

지휘하에 통합 정찰병력을 구성하여 여주 북방 남한강 건너 이포대교가 있는 이호리에서

출발하여 북으로 전진하였다.

 

병력들은 2대의 트럭과 8대의 Jeep차에 분산 승차하여 공중에서 정찰하는 정찰기와 교신

을 유지하면서 북쪽으로 전진했다. 정찰대는 미첼이 선도하여 고래산의 동측 자락이며 험

준한 453고지를 지나자 마자 우측으로 일신리로 통하는 계곡과 좌측(서쪽)으로 쌍굴로 통

하는 분지점인 금당천변에 이르렀다.

 

미첼대위는 뒤 따르던 장교와 상의하여 후방에서 올라오고 있는 차량을 기다려 전진하기

보다는 먼저 쌍굴로 가 정탐하기로 하였고 그 장교는 후방 차량이 도착하기 전에 분기점

에서 분기된 일신리 계곡마을을 정탐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자기의 Jeep차 운전병을 도로

변에 남겨두고 혼자 일신리로 정찰을 나갔으나 행방불명이 되었고 운전병도 기다리던 중 

주변에 중공군의 인기척이 확인되어 급히 빠져 나와 정찰대 본류에 합류하고자 했으나

사격을 받아 차는 전복되고 사망하였다.

 

또한 선발대인 미첼대위 일행과 후방에서 합류하고 있는 정찰대 역시 쌍굴지역에 접근하

자 마자 박격포와 기관총 사격을 받게 되었다. 정찰대는 차량에서 하차하여 주변 금당천

등 엄폐물을 찾아 사격을 피하고자 했으며 미첼대위는 쌍안경으로 주변을 확인한바 중공

군이 지나온 453고지와 능선에 출현하였고 지나쳐온 남측 도로에도 출현하여 포위되었음

을 직감하고 차량에서 휴대가 가능한 무기와 탄약, 무전기만 휴대한 체 동측 쌍굴이 있는

인접한 330고지 능선으로 급히 오르도록 명령하였다. 이 때 중공군도 미군을 완전하게 포

위하고자 도로에서 330고지 능선 반대편(일신 측)에서 동시에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다행히도 미군이 먼저 정상에 올라 접근하는 중공군을 격퇴하였다. 하지만 이 능선은 북

측으로 이어져 있었기에 중공군은 이 능선을 따라 계속적으로 인해전술로 공격해 왔고 

맞은편 453 고지에서 내려다 보며 기관총과 박격포 사격을 계속 해오고 있어 고지의 미군

들은 대단히 위태하였다.

정찰기는 이 상황을 연대장에게 보고하였고 연대장은 즉시 가장 쌍굴에 근접한 대대에게 

명령하여 포위된 정찰대를 구출하도록 명하였으며 항공지원을 요청하였다.

 

비상 발진한 중대단위 구출대는 트럭을 타고 양동측에서 북상하여 접근하던 중 453

고지로부터 사격을 받자 소대들을 산개시켜 고지를 공격하여 중공군을 격퇴하였고 날이

저물어서 더 이상 구출작전을 못하고 매복에 들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고지에 있었던 

정찰대 소속의 위생병이 발견되어 현재 정찰대가 도로에 연한 330 고지에 싸우고 있으며

일부 생존해 있으나 중공군의 줄기찬 공격에 전멸될 위기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중대장은 즉시 도로에 있던 예비대 소대장에게 명령하여 매복을 중지하고 즉각 능선으로

올라 야간 구출작전을 전개하도록 하였고 맞은편 453고지의 소대들의 통제하여 오인사격

을 예방하였고 구출작전은 성공하였다.

 

부대원들은 한 겨울 한 밤의 산야에서 부는 매서운 바람과 추위를 견디며 탄약이 떨어져

항공기로 보급을 받아가며 용감하게 싸웠고 한 대원은 복부에 총상을 입은 상태로 1.5

간 동안 동료의 경기관총의 탄창을 보급하다 전사하였고 한 장교는 6군데 총상을 입고도 

끝가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능선의 정찰대원 중 12명만 온전하였고 60명 중 나머지는 

죽거나 부상을 당하였다.”

 

어제 탐방했던 장소는 위에서 요약한 미 정찰대가 사투를 벌이며 지평을 탈환하는 교두보

를 확보하고 중공군의 현황을 파악한 지역이었다. 또한 보이지 않게 후방으로 침투하면서

인해전술로 공격해 오는 중공군과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다 준 계기

가 되기도 하였다.

우리는 11월 말의 차가운 바람속에서 쌍굴로 향하여 없어진 궤도의 흔적을 따라 입구까

지 가기도 하였고 주변 능선을 둘러 보면서 미군들의 생사의 현장을 회상할 수 있었다

또한 일신리 구둔역 주변을 거닐면서 정탐중에 행방불명 되었던 미군장교와 기습을 당한 

운전병의 비극적 장소를 가늠해 보기도 하였다.

 

그들의 영혼은 70년이 흘렀지만 이곳 쌍굴 산야에서 바람이 되어 흔들리는 나무가 되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를 위해 국가, 책임 및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이억만리 태평양을 건너 한번도 보지도 못한 나라(대한민국) 그리고 한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대한사람)을 구하기 위해 용감히 싸웠고 목숨을 바쳤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전투 현장의 한복판에 건립된 쌍굴전투 기념비


탐방을 마치고 귀환하는 길 역시 심각한 체증이 우려되어 지평리에서 곡수리를 경유 대신

IC까지 연결되며 지평리 전투 때 미 기갑 구원전차부대(Crombez TFT) 경로인 341도로를 

타고 남하하여 2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광주JC를 향해 주행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홍천

이포 IC부터 교통체증이 발생하여 동곤지암IC에서 나와서 98번 도로를 타고 남서로 진행하

3번 국도를 타고 탔으나 다시 교통체증이 있어 곤지암 천변도로 및 서하리 경안천 천

변도로를 타고 광주IC 근처에서 43번 국도를 타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다시 퇴촌으로

갔다. 해협산 넘는 길목에 많은 음식점이 있었으나 저녁 6시경 Lotteria에 서 간단하게 저

녁을 들고 집으로 복귀하니 밤 8시였다. 10시간의 여정이었지만 가보고 싶었던 전적지

를 잘 다녀와서 대단히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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