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ral Ridgway’s Strategic & Tactics That Turned Korean War around. 한국전의 양상을 바꾼 리지웨이 장군의 전략과 전술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미래에 대비하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라고 한다. 현 상황을 볼 때 70여년간 지속되어 온 한미동맹의 굳건한 토대 위에서만이 대한민국의 안위가 보장되고 지속적으로 경제가 성장하여 국민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We have heard that history gives heritage for
future. In consideration of recent situation around Korea, I think that our
country can survive and develop its economy continuously only through the
Korean and USA Alliance lasted for seventy(70) years.
이러한 때에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전쟁에서의 영웅 맥아더 장군과 알려지지 않았지만 패망의 순간에서 전쟁의 승기를 잡은 위대한 리지웨이 장군의 리더쉽에 대하여 비교분석하고 혈맹의 의미를 다시 새기며 삶의 지혜를 구하고자 한다.
At this moment, I would like to get a life
heritage by comparing the leadership between General Ridgway who turned the war
tide around, and General MacArthur famous for Great General of Korean War, by
reminding of the alliance established by bloodshed fighting against the
communist.
1950.11월 중공군이 대거 참전하면서 북한으로 진격했던 미군과 휘하의 국군은 한반도에서 공산주의를 몰아내고 독립적인 자유 대한민국으로 통일하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공군에 쫓겨서 남으로 후퇴하고 일본으로 철수하는 상황까지 맞게 되었다. The US Army and Korean Army onward to North Korea, had faced with the difficult situation to integrate an independent country, pushing communist away from the continent as Chinese People Army engaged in the war. The US and Korean Army had more desperate situation to all-out pull back southward and even to Japan.
무었이 이러한 통일의 기회를 180도 반전하여 대한민국을 존망의 위기로 내 몰았는가? 미국인가 한국인가? 한국이 결코 배제될 수 없을 것이지만 당시의 전황에서 최대의 권하을 갖고 있던 유엔군 사령관이며 미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목적과 전략상의 실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What made this opportunity to be upside down to the threat of national existence? The United Stated of America or Republic of Korea? Korea could not be exempted for this blame, but the mistake of General MacArthur’s Purpose and Strategy also could not be forgotten.
여기서는 미국의 군사학 전문 대학에서 2012년 발행한 논문을 근거로 두 장군의 한국전에서의 전략상의 차이점과 그때의 상황에 대한 견해의 차이를 비교하여 왜 맥아더 장군이 북진에 실패했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Here, I would like to identify the defeat cause
of MacArthur’s war in Korea, comparing the difference between General MacArthur
and Ridgway’s strategy and situation in time of the battles, based on the
thesis published in 2012 by the college of military subjects in USA.
당시 미국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막강한 총 사령관의 권한을 부여하였지만 소련의 공산주의 확장의도에 대응하여 미국의 군사력을 유럽을 우선하여 사용하고 아시아에서 는 최소한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2차 세계대전이 종료한 후 군비축소라는 국가적인 정책을 실시하여 미국의 군사력은 한정된 수준으로 최소화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At that time, American President gave the powerful authority to the General MacArthur as the commander of UN Forces including all 8th US Army though, but he intended to use American military power with priority for Europe, and to use it at minimum, Asia, because America had minimized its military power by disarmament policy just after the World War 2.
이미 일본에 주둔했던 미8군이 전체 다 한국전에 투입된 상태에서 맥아더 장군의 오판에 따른 엄청난 중공군의 출현은 결국 추가적으로 4개 사단의 증원과 더불어 중공본토에 대한 공격과 원자폭탄의 사용을 요청받게 되었고 그렇게 하는 경우 소련과 3차 세계대전을 각오하여야 했다. The Chinese Force sudden appearance in time of all the force of the 8th US Army stationed in Japan, dispatched to Korean battle, influenced General MacArthur to ask for four(4) more US divisions, considering use of atomic bomb in despite of World War 3 against the Soviet Union.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 현직 총사령관의 잘못된 목적과 전략에 대하여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한국전에서 소련의 진정한 의도는 중공을 이용하여 미국의 군사력을 소모하게 하여 유럽으로 진군하여 공산주의를 확장하는 것으로 대통령은 판단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 본토방위를 위해 주둔하고 있는 4개 사단의 모든 전력을 한군전에 투입할 수 없었고 한반도에서 공산주의를 몰아내고 통일된 한국을 수립할 능력이 없었다. The American President had to decide against the wrong purpose and relevant strategy of the US Military Commander. The president had known that the real purpose of the Soviet Union was to make USA consuming her military power through use of China for the attack of Europe for their communism expansion. So, the America had no power to dispatch all the reserved four(4) divisional forces to Korea, to expel the Communist from Korea and establish the integrated Korea.
이러한 미 대통령의 목적과 전력에 대한 한계를 맥아더 장군은 이해하지 못하였고 대통령이 군통수권자라는 사실을 존중하지 못하고 아시아로부터 공산주의를 발본쇄본하고자 하였고 한국전으로부터 중공전으로 종국에는 대 소련전으로 전쟁을 확대하고자 했다. The General MacArthur did not understand his President’s purpose and available national resources. He also did not respect the American President’s authority as the chief command of the US military force. He tried to eliminate Communism entirely from Asia, and extend the war toward China and the Soviet Union.
반면에 리지웨이 장군은 현재의 미군의 능력과 대통령의 의도를 이해하고 한반도에서 침공전의 상태를 만들어 공산주의로부터 남한을 보호하는 전략을 추구하였다. 그가 맥아더 장군 휘하의 8군 사령관인 워커장군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후임으로 부임하자 마자 맥아도 장군과 만나 군사작전상의 모든 권한에 대하여 전권을 보장받고자 하였고 맥아더 장군의 잘못된 전략에 의해 그가 의도한 작전이 교란되지 않도록 확언을 받았다. On the other hand, the General Ridgway had fully understood the intention of the American President to recover and protect South Korea. He arrived in Korea just after the death of General Walker by car accident, he tried to be ensured all his authority in regard of military actions, meeting with the General MacArthur, and to prevent disturbance of MacArthur’s intercept with his wrong purpose and strategy.
그는 맥아더 장군과 달리 직접 전선을 시찰하면서 미군의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했다. 특히 전선의 야전초소를 방문하여 지휘관으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으면서 작전에 임하는 부대의 군기와 전술에 대하여 평가를 하였고 그가 지시하는 명령에 따른 전략 이행상태를 확인했다. Different from the General MacArthur, he patrolled himself the front lines to accurately identify the status of American force. He specifically visited to patrol posts, and reported by officers about the status of fighting will and tactics, and confirmed the performance of his tactical orders.
모든 예하 부대에 대해서 인접 부대와 연계하여 공격선을 유지하고 정찰을 강화하여 적의 위치와 규모를 파악하여 보고를 하게 하였다. 특히 병사들에게 다은과 같은 명확한 전술적 지침을 하달하였다. “적을 먼저 찾아라. 다음에 노출시켜라. 그리고 파괴하라.” 이것은 부대별로 단독으로 진격하는 맥아더 장군의 전술과는 달리 부대간의 철저히 합동하여 전선을 형성하고 진격과 후퇴를 하는 전술을 채택하여 중공군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The General ordered his following units to maintain the attacking line with strengthening reconnaissance to identify the enemy positions and sizes. He also addressed troopers of following instruction for the battle rules. “Seek, Fix and Kill” This tactic was different from that of MacArthur allowing independent unit operation, in terms of assembling units together to form the attack and retreat line.
인해전술과 손자병법을 구사하는 중공군에 북진시의 패퇴에 대한 공포감으로 저에 없는 막강한 화력을 보유하고도 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후퇴하고자 의도하는 지휘관에 대해서는 현장에서 적임자로 교체하는 조치를 취하여 휘하 부대 지휘관에게 명령체계를 따르도록 하였다. 즉 일선 부대의 전술에 대하여 방임하는 맥아더 장군과는 달리 전략이 달성될 수 있는 전술을 발휘하도록 기본적 지침을 계속적으로 리지웨이 장군은 부여하였다. The general leaded his subordinate officers through the actions that any officer did not collect enemy information, and tried to retreat, should be fired out from the line. The general encouraged his officers to know the enemy and to use our strength of fire powers. He was absolutely different from MacArthur to lead the units, addressing tactical rules continuously different from that of MacArthur delegating all authority without any interception.
중공군은 미군의 항공화력에 따라 주간 기동이 제한되는데다 남진에 따른 공격선이 길어 지면서 병참선이 취약해졌고 3개월 전투준비 하여 3일밖에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전투력의 한계를 장군은 결국 확인하였다. 장군은 지속적인 정찰과 화력을 동원한 군사적인 압박을 통해 중공군이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살상을 최대화하여 병력규모의 열세를 만회하였다. He identified that Chinese could not sustain their attack more than three(3) days after three(3) months preparation as they could not move at day times under the American Air Power and their logistic line was more prolonged to the south. He succeeded to recover shortage of his forces with the military pressure utilizing continual reconnaissance and fire powers to maximize destroying, and not to allow enemy the time to replenish loss.
이것은 맥아더 장군이 4개 사단의 미군 증원없이는 한국전에서 중공군에 대항할 수 없으며 일본으로 철수할 수 밖에 없다는 판단과는 다른 것이었으며 리지웨이 장군의 1951.3월 대담한 작전(Operation Dauntless)을 통해 그 전략의 성과가 입증되었다. This strategy was different from that of general MacArthur to evacuate all his forces to Japan without supplement of four(4) more American divisions. His strategy was proven to be successful by the Operation Dauntless initiated in Mar. 1951.
맥아더 장군은 본인의 판단에 따라 전략을 수립하면 모든 전투에 대한 전술은 하부에 위임하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었고 그래서 부진 시 일선 부대의 첩보보다는 첩보부대의 정보에 의존하여 개인적으로 전황을 파악하여 가장 빨리 전진하여 최 단시간에 북한을 점령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즉 중공이 개입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속도전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일선 전투 지휘관의 의견을 무시하였기에 중공군의 참전과 그들의 전략을 오판하였고 결국 미군을 적의 함정속으로 깊이 빠져 들게 하고 말았다. General MacArthur had depended on intelligence collected by him not by his front line reports, to push his forces speeding their attack up with intention not to allow China intervention time for Korean war. If he established his strategy, he did fully delegate it to his subordinates, and not intervene the tactical actions. Consequently, General MacArthur ignored opinions of his front line officers, and made big mistake to let his forces drop deeply into Chinese traps.
반면에 리지웨이 장군은 대통령과 미국 정치계의 뜻을 이해하고 현재의 병력과 자원을 활용하여 한반도에서 중공과의 전쟁을 수행하기로 전략을 수립하였고 전선의 상황에서 아군의 장점인 화력사용을 극대화하고 적의 약점인 병참체계를 약화시키는 작전을 구사하였다. 1951.2.13-15일 미2사단 23연대 양평 지평리 전투는 대규모 중공군을 평지로 노출시켜 모든 화력을 동원하여 살상하는 작전이었다. On the other hand, General Ridgway understood the purpose of the American President and Congress, established his strategy to fight against Chinese Forces with the current available American Forces, and address his tactics to maximize Air, Armor & Artillery Powers, and to focus on attacking Chinese weakness of Logistics. The battle of Jipyong-ni taken place in 13 to 15 Feb. 1951 near Yangpyong, was the intended operation to seek enemy, to fix and destroy with all fire powers.
지속적으로 전차를 활용한 위력수색으로 적진 깊숙히 침투 적의 동향을 파악하고 적이 공격을 가해오면 화력을 적용하기 용이한 지역으로 후퇴하였다. 또 적이 후퇴하면 병참을 제공받아 반격할 기회를 주지 않도록 즉각 반격을 하였다. 이렇게 야전에서 지휘관들이 전투를 수행하도록 하여 장군의 전략을 달성하였다. His tactic asked to mobilize the armored equipment, to infiltrate deeply into enemy position for get the latest enemy intelligence, and to retreat at the zone appropriate to utilize Fire Powers in case they were attacked. If Chinese started to retreat, he asked to attack immediately not to allow enemy any replenishing loss. These tactical guidances helped his front line officers to accomplish his strategy.
맥아더 장군의 지리적으로 인접한 이점을 활용하여 막대한 병력의 중공군에 대한 확전을 통한 공산주의 제거가 목적이 아닌 전쟁전의 38도선 회복 및 남한의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는 목적으로 전략을 변경하였으며 현재의 휴전선에서 전진을 멈추고 방어를 강화하였다. The General Ridgway had changed from MacArthur’s purpose to expand the war to China having enormous geographical advantage and forces for elimination of Communist from the peninsular, to recover the 38th parallel, and to resist Communism Expansion in the peninsular. He stopped his attack at the current DMZ line to reinforce his defense lines.
장군의 위대한 업적은 2차 세계대전때 마셜장군의 작전참모 경력과 미군 최초 공수여단장으로 수행한 전투경험에서 익혔던 전략과 전술에 기인되었다 본다. 즉 작전을 수행하기 전에 전황을 살피고 전투에서 맞게 될 위험성과 기회를 파악하여 적의 강점을 약화시키고 약점을 공략하는 전술로 작전을 실행하는 것이었다. The General’s great performance is contributed from his military experiences of the 2nd World War including Staff of General Marshall and Regiment Commander of the first American Air Born Force. This tactic is to observe battle situations before operation, to identify risks and opportunity from the observation, and to devise the measure to weaken enemy strength and to attack enemy weakness for the action.
막강한 병력의 중공군은 미군의 부대간 연계하여 전선을 구축하여 부상하는 작전에서 후방으로 침투하여 각개 부대를 파괴하는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었고 미군의 정찰작전에 지속적으로 접촉되면서 그들의 은폐한 위치가 노출되어 막강한 미군의 화력에 살상을 당하였다. The Chinese Forces could not have chances to infiltrate into rear of The American Attacking Line tightly assembled with units, as they were observed with their locations by the American continual reconnaissance, and destroyed by the terrifying American Fire Powers.
결국 리지웨이 장군이 현명하게 전략을 실행함으로 서 1953.7월 중공은 더 이상 미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공산화하는 목적을 포기하고 현재의 휴전선에서 휴전하기로 합의하였고 미군은 한반도에서 종이 호랑이로 전락되며 동남아 및 유럽 전역이 공산화되고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3차 세계대전이 발생할 위험성이 예방되었다. Eventually, the Ridgway’s smart strategy forced Chinese to give up their purpose of communism export and to accept the proposal to cease fire at the current DMZ line in Jul. 1953. The USA had prevented from becoming a Paper Tiger, being conquered by the Communist in Korean Peninsula, and risking to use atomic bombs against Soviet Union in the 3rd World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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