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에서 미 해병 1사단의 1951년 3월부터 5월까지 진격로 탐방 및 자유의 가치 (2019년 8월 19일)
우리가
그냥
누리는
이
자유와
민주주의
체제는
어떻게
얻어지게
되었으며
우리가
가는
지역의
눈에
보이는
산야에
이러한
자유를
얻기
위해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알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우리는
누구에게
감사하고
그
정신을
물려
받아
앞으로
무엇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평소에 무심코 서울/양양 고속도로를 주행하면서, 포천/구리간 고속도로에서,
경기도
광주
근교의
중부
고속도로에서, 춘천의 소양강과 북한강을 가면서 이 눈에 보이는 평온한 경관은 어떠한 사연이 있었는지 특히 공산주의자와 벌인 625전쟁 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항상 마음속에 굼금하였다. 그리고 무작정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야 평온한 산야에 깃들여 있는 의미를 조금 찾았고 우리의 누리는 자유에 대한 소중함과 가치를 같이 나누고 싶었다.
또한
평상
시부터
존경해
오던
미
해병
1사단의
1950년
12월
장진호
철수
이
후
원주/황성/홍천 및 소양강 진격로와 작전에 대해 굼금해 오던 중 집사람이 휴가를 낼 수 있다 하여 사전에 여러 자료를 보았고 드디어 그들의 진격로를 탐방할 수 있게 되었고 물론 자유의 의미와 소중함 그리고 나의 삶의 가치를 다시 기리게 되었다.
그러나
간략하게
당시의
전황을
이해하면
좋을
것
같아
아래와
같이
기술한다.
1951년 4월 22일 국군 6사단이 화천군 사창리에서 5차
춘계
대
공세를
펼친
중공군에게
대패하는
바람에
그
동안 14후퇴 후 어렵게
진격했던 화천까지의 Quantico 방어선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중공군의 가평 함락 및 북/동측으로부터 서울진격을 막기 위해 긴급하게 영연방 27여단의 호주 Canada대대가 출동하여 가평 북면에서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했고 다시 No
Name 방어선으로
후퇴하여
전열을
다지고
5월
초
반격을
개시하여
가평과
춘천
및
소양강
선까지
탈환하던
중에
중공군의
재차
대공세가
소양강을 건너 홍천방향으로
예상되어 Van Fleet장군은 아군 작전구역 변경을 실시하여 미 해병 1사단을 9군단 산하에서 10군단 산하로 조정하여 예상되는 공세에 대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은 5월 18일 공세 때 기습적으로 미 10군단 우측의 인제 국군 2개 사단과 국군 3군단을 노렸고 강원도 현리에서 또 다시 국군이 대패하여 중공군은 남쪽으로 돌파하여 현재 영동고속도로가 지나는 하진부리 및 속사까지 진출한 바람에 인접한 10군단 좌측 미 2사단이 위협을 받게 되어 다시 Van Fleet장군은 미 해병 1사단 및 미 육군 2사단을 후퇴시킨 후 군단 작전구역을 조정하여 위기를 수습하고자 했다. 이 때 작전무능으로 국군 3군단은 해체되고 산하의 각 한국군 사단은 미 군단에 재편되었고 사창리 패전 후 정비된 국군 8사단은 10군단 소속이 되었으나 한국군 3군단 작전지역은
10군단이
떠
맞게
되었다.
이
때
군단 좌측의
미
해병
1사단은
2사단
작전구역까지
확장하여
방어하게
되었고
2사단은
국군
8사단이
남쪽에서
저지선을
방어할
때
홍천에서
북동쪽
인제
방향으로
진격하여
중공군의
후방을
차단하고
미
해병도
소양강을
넘어
양구지역을
탈환하고자
하였다.
중공군은 춘계 2차 대 공세 때 10군단의 우측 국군사단과 한국군 3군단
경계지역을
목표로
했으나
10군단
전체
전선도
공격을
동시에
가하여
미군사단을
국군과
분리하여
격리시키고
각개
격파하고자
한
것이다.
이
때 5월 초부터 방어태세를 강화한 미 해병 1사단 및 미 2사단은 No
Name 방어선으로부터
북측으로
진격하여
소양강과
홍천강
사이의
진격선까지
진출하여
중공군의
공세에
대비하고 있었다.
미 2사단 38연대 가리산
1031고지의
경우
주요
정상의
능선에
각
대대가
참호를
깊이
파고
마대를 쌓고 필요 시 아군지역에 진중포격을 하도록 대비하였고 적의
예상되는
공격로에
철조망을
설치하고
주변에
지뢰를
포설하였다. 화력지원을 위한 탄약도 충분히 비치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Ridgway
장군의
전략에
따라
대대
급의
전초기지를
연대별로
고지
북측으로
전진
설치하여
적의
공격을
사전에
탐지하고
적이
공격
시
지연시키고자
하였다. 적의 주공으로 예상되었던 미
해병
1사단의
경우
춘천에서
홍천으로
진입하는
원창리
고개와
주변에
5연대를
전진
배치하였고
산하
각
대대는
연대의
야포
화력지원에
의해
보호되도록
조치하였다.
이러한
대비태세
덕분에
5월
18일
적의
공격
시
미
2사단
38연대는
1031고지를 방어할 수 있었고 미 해병은 춘천 남측의 원창리 고개에서 매복하여 중공군을 대패시킬 수 있었다. 10군단 전선이 안정되자 중공군의 공세는 곧 둔화되었고 진격해오는 미 2사단의 포위를 우려해서 중동부로 남진했던 병력이 급하게 후퇴하면서 중공군의 춘계 대 공세는 끝나게 되었다. 중공군은 인해전술을 통하여 3개 사단으로 구성된 각 군단으로 미군 각 사단을 공격하고 후방을 차단하여 각 부대를 각개 격파하고자 했으나 미군의 기갑부대 위력 및 야전포/ 항공 화력 운용과 군단 예비사단인 미 3사단 기동성에 막혀서 공세를 지속할 수 없었고 이 후 종전까지 더 이상의 대 규모 공세를 시도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중공군에게 미 해병대는 어는 전선에서나 훈련된 살인병기로 알려 졌고 한 때 3개
군단을
동원하여 10:1의 인해전술로 포위하고도 사단급의 미 해병대를 파괴하지 못한 장진호의 복수를 꿈꾸기도 했으나 3개월 간의 조우에서 더 이상 그들이 대적할 수 없는 상대임을 알게 되었다.
2019년 8월 19일 오전 0800
집사람이
준비한
도시락을
싸
가지고
서울
송파구
집을
출발하여
강변북로를
타고
망우리
고개로
이어지는 6번 국도로 진입하였다. 미음나루를 거쳐 가운 사거리에서 삼패 사거리를 거쳐 팔당대교를 통과한 후 양평 읍 북측을 우회하여 북동쪽 방향으로 주행하여 청운면 근처의 분기점에서 횡성 방향으로 주행하였다. 횡성의 신촌리 근처 분기점에서 횡성방향으로 남진하여 횡성 읍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양평에서 횡성까지의 6번 도로는 북쪽으로 20
Km 떨어진
서울/양양 고속도로와 평행하였으며 중간 정도에 팔봉산과 대명
Vivaldi Park Resort가
위치하였다. 본 도로는 한군 전 당시 No Name 저지선과 일치하며 북한산으로 부터 중공군의 거점인 경기도 광주지역의 남쪽과 구리 덕소를 지나 용문산으로 부터 횡성까지 동북측으로 이어진 전선이었다. 만약에 1951년 2월 당시에 이 도로를 주행하였다면 근접 한 야산으로부터 중공군의 저격을 받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생각한다.
횡성에서는 1951년 2월 국군 8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미 지원부대의 대규모 학살현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사창리 고개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오음산 기슭에 창동리가 있는데 여기에 주둔했던 지원부대가 1차 공근리로 탈출했다가 다시 횡성으로 탈출하는 과정에 횡성 입구 섬강다리를 건너기 전부터 계곡사이의 학담리까지 4
Km구간이
바로
그
죽음의
지역이었다. 지금은 횡성IC가 근처에 있고 5번 국도의 학곡 분기점이 있어 지형이 많이 바뀌었으나 횡성북측 앵단산과 백한산 등선 사이 남북으로 이어진 계곡사이는 작은 천이 흐르고 낮으막한 능선이 동서로 자리하여 적의 매복과 조준사격이 용이한 지형이었다.
큰
도로로
연결된
옛
길로
들어가
당시
의
지형적인
특성을
파악해
보았다.
250-300 M 의
낮은
야산으로
접근로에는
공장과
장례식장이
위치하고
있었다.
1951년
3월
초
진격했던
미
해병의
증언에
따르면
바로
이
구간에
3주
전에
파괴되어
버려진
미군
탱크와
야포,
고사
기관포
및
트럭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고
바닥에는
얼어서
썩지
않은
군복이
벋겨진
내복상태의
미군
사체가
널려
있었다
한다.
중공군이
미군의
겨울
군복을
탐내어
벗겨
간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6번 국도를 북상하여 홍천방향 삼마치 고개로 가다가 미군 보병대대가 주둔했으며 1차적으로 지원부대가 집결했던 공근리로 들어가 보았다. 오음산 주변의 계곡답지 않게 비교적 넓은 평지를 형성하고 있어 부대의 집결지 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군단장은 국군이 붕괴되었을 때 지원부대가 즉각 횡성으로 탈출하지 않고 이 지역에 머문 것에 대해 대대장을 비난하자 했으나 조사결과 대대장은 실제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다라고 판단되었다 한다. 실제로 주된 사유는 전방의 국군 전투부대가 후방 미군 지원부대에 아무런 연락없이 패퇴한 것이며 지원부대는 군단 소속으로 서 관련 사단장이 명령할 권한이 없어 군단장 및 관련 참모진에게 명령을 받는 데 시간이 소용되었고 횡성 북방의 진지에 있던 국군이 조기에 철수하여 지원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원인이야
어찌
되었던지
지급된
장비를
지키고
후퇴
명령을
수행하고자
적의
총탄이
빗발치는
죽음의
골짜기에서
대열을
지키며
비겁하지
않게
죽어간
병사들의
정신은
지금도
이
골짜기에
살아
있지
않나
생각한다.
삼마치
고개는
2년
전에
방문한
적이
있는
데
옛길로
들어서야
볼
수
있으며
정상에
돌로
된
이정표가
서
있다.
이
고개길로
국군들이
패주를
하게
되었고
피난민
중에
북한군
등이
숨어
있다
생각되어
미군의
기총소사가
가해져
많은
민간인
피해가
있었다
한다.
930
M 오음산
주변으로부터
홍천으로
가는
6번
국도의
우
측방
고지들은
미
해병대가 1951년 2월 원주로부터 기동하여 진격을 한 지역으로 알려졌다. 특히 지원부대가 전멸했던 횡성 입구의 능선에는 반격을 막기 위해 중공군의 저항이 심하였다 한다.
홍천은
처음
방문하는
도시로
홍천
강을
끼고
동서로
형성된
생각보다는
작은
도시였다. 이 도시는 한군 전 당시 남침하는 중공군의 가장 큰 거점도시였다 한다. 1951년 2월 원주 대 공세 및 지평전투에서 대부분의 중공군이 홍천으로 집결하여 보급을 받고 남하하였다.
홍천시내를
주행한
뒤
북측으로
가서
홍천
북쪽의
북방면에
위치한
강재구
소령
기념공원을
방문하여
방문록에
기록하였다. 월남전 참전을 대비하여 현재 공원이 훈련장이었는데 수류탄 투척을 하던 한병사가 실수로 수류탄이 거꾸로 부대원쪽으로 떨어지자 소령이 몸으로 덮어서 피해를 줄였다 한다. 국민학교 때 소령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나는데 이 곳 홍천 북방에서 실제 상황을 자세히 확인하게 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사후에 훈장을 수여 받았다 한다.
어느덧 1400가 되어서 점심을 먹을 장소를 찾기 위해 망령산과 구절산 계곡으로 들어가다가 좌측 계곡으로 강원도 자연환경 연구공원 이정표를 발견하여 주행하였다. 4 Km 들어가니 대룡 저수지가 나타나고 곧 이어서 공원이 보였다. 한적한 장소로 식사를 할 수 있는 야외 벤치가 설치되어 있고 주차장과 목재 Deck Board로 제작된 보행로가 주변 천변에 설치되어 있었다. 집에서 준비한 도시락으로 식사를 하고 집사람과 같이 주변을 산책하였다. 멀리 서울양양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것으로 보였다. 서울과 달리 주변 공기가 맑고 시원하였다. 다시 가족과 방문하고 싶은 조용한 공원이었다.
식사하고
공원을
나와서
강재구
소령
공원을
지나
다시
홍천으로
가서
44번
국도를
타고
가리산이
있는
두촌면
자은리로
향했다.
30 Km쯤
북동방향으로
뻗어
있는
도로를
주행하다가
중간의
휴계소에서
음료수를
산
다음에
가리산이
있는
두촌면으로
들어
갔다.
어제
밤에
읽었던
미
38연대
참전용사의
지도에
있는
접근로는
찾기가
어려워서
가리산
자연
휴양림이
있는
긴
계곡으로
들어
갔다.
10 Km의
진입로는
계곡을
따라
나
있었으며
입구에
도달했으나
무료로
운영이
되어
입장료를
구입하지
않고
진행할
수
있었다.
표고
450 M 산허리에 주차장이 있었고 주변에 숙박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여기서 험한 능선 사이로 가리산 정상이 보였다. 차에서 내려 주변을 확인해 보니 바로 주차장 위에 관리사무소가 있으며 앞 쪽에 미 23연대 소속으로 가리산 전투에 참전했다는 프랑스군 대대 기념비가 서 있었다. 또한 주차장 한편에는 한국 해병 1연대가 미 해병 1사단 소속으로 편입되어
1951년
3월
가리산을
탈환했다는
사실이
기록된
게시판이
설치되어
있고
바로
옆에
미군부터
무상
공여되었던
군용
Patton 탱크가
지금은
폐기되어
전시되어
있었다.
주차장에서
준비해온
커피를
마시고
난
후
가리산
정상으로
나
있는
등반로를
타고
조금
올라가
보았다.
공원의
포장도로가
끝나고
비포장
도로가
있다가
소로로
바뀌면서
등산로
입구
표석이
보였다.
여름철이라
나무가
우거져서
산
정상은
보이지
않고
계곡의
물소리만
들리고
한
여름인데도
서늘한
분위가가
느껴져
걷기가
좋았다.
미군의
증언으로
당시
단독군장으로
1시간이 정상까지 올라 간다 했는데 실제로 현장에서 보니 2시간은 족히 걸릴 것으로 확인이 되었다.
집
사람은
주차장
그늘에서
차량
창문을
열고
계곡의
시원함을
즐기다가
문득
내가
나타나자
어떻게
이렇게
높은
지역에서
전투를
할
수
있었는지
굼금하다고
했다.
당시
이
정상을
지키던
미군은
한국인
노무지원
부대의
도움으로
철조망,
식수
및
탄약을
운반하였다
하며
이
때
우마차를
이용하여
최대한
계곡
사이로
올라
왔고
이
후
지계를
이용하였다
한다.
아마도
하루에
한번
많으면
2번
운반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정상을
바라
보면서
중공군과
용감하게
맞서
싸웠던
미군
장병들을
생각해
보았다.
전사에
기록되어
있듯이
그들은
5월의
찬
바람이
산
능선을
휘몰아
칠
때에
능선과
주변
산허리에서
한
밤중에
까맣게
몰려
오는
중공군에
대항하여
사격하고
접근하면
수류탄을
던지고
무전으로
연락하여
포병
지원을
요청하고
항공
폭격이
있으면
몸을
숨기고
주변
참호를
확인하며
현
전선을
확인하고
적에게
점령되면
후퇴했다
다시
역습을
하기를
반복하다가
너무도
많은
적에
역부족이
되는
순간에
아군이
있고
피아
식별이
어려운
순간임에도
능선에
쏟아진
진지
내
포격이
있자
사전에
훈련
받은
데로
깊은
참호로
엄폐하여
능선의
포격을
피하고
다시
나와서
살아
있는
적을
소탕하였다.
당시
참전했던
한
용사는
미
전투기의
오폭으로 Napalm탄에 맞아 오른 쪽 손을 상실하였고 바로 후송되어 전역을 하게 되었는데 한국을 방문하던 친구에게 부탁하여 그가 받은 훈장을 수리산 정상에서 남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한다.
가리산은 1051 M로 소양강과 홍천강 사이의 방어선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춘천, 홍천 및 인제의 적을 감제할 수 있는 중요성이 있다 한다. 홍천에서 북면의 강재구 소령 공원 및 자연환경 연구공원의 계곡과 주변의 산 그리고 홍천으로부터 인제로 뻗은 44번 국도 주변의 공작산(887
M), 대룡산(900
M), 그리고
남서측으로
팔봉산에
연해
있는
홍천강
북단에
연해
있는
금학산(655
M), 강촌
IC근처의
종학산(502
M)등이
1951년
4월
말의
주요
중부전선
방어선이었다.
1630
집으로
귀경하기
위해
동홍천
IC로
진입해
고속도로로
주행했으나
곧
이어
체증이
있어
가다
서다를
반복하기에
강촌
IC에서
나와서
홍천을
찌고
주행하였다. 내비는 다시 고속도로 진입을 표시하나 무시하고 고속도로와 연한 지방도로를 타고 춘천방향인 동쪽으로 주행하여 남춘천 IC근처에서 계속 춘천방향으로 주행하다 합류되는 춘천쪽의 북측 원창고객에서 오는 5번 국도와 합류지점에서 남쪽으로 주행하여 홍천에서 44번 국도를 타고 남서쪽으로 주행하여 양평을 경유 집으로 돌아 왔다. 이 때가 1830
이었으며
식사시간을
제외하면 3시간 반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주변의 목적지를 입력하기 전에 차분하게 지도를 보고 경로를 정하였다면 강촌 IC에서
춘천
측으로
주행하지
않고
서쪽으로
홍천
강을
건너
설악으로
갔거나
남춘천
IC에서 남쪽으로 Vivaldi Park로 주행했다면 족히 2시간이면
될
것으로
판단되었다. 참고로 출발 하기 전에 차에 기름을 가득 넣었는데 탐방을 위해 370 Km 주행하였고 기름의 반을 소모하였으나 마음은 한결 뿌듯하고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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