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중성(七重城)과 전투
七重城은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지역에 있는 삼국시대의 성이다. 이 지역은 백제의 난은별(難隱別)이었는데, 고구려와 신라는 七重城이라 하였으며 경덕왕 때 중성(重城)이라 했다. 성의 둘레가 약 590~680m의 석축 산성으로 성 안에 우물도 한 군데 있었다. 서울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은 요새였기 때문에 삼국시대부터 많은 전투가 있었다. 선덕여왕 7년(638) 고구려 군이 쳐들어오니 주민들이 산 속으로 피하였다. 이에 왕은 알천(閼川)을 보내 七重城 밖에서 싸워 물리쳤다.
태종 무열왕 7년(660) 고구려 군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와 七重城을 포위하였다. 현령 필부(匹夫)는 20여일 동안 성을 잘 지켰다. 그러나 고구려 군에 내응한 대나마(大奈麻) 비삽(比揷)을 참살한 후 전세가 불리하여 졌다. 이 때 필부는 말 하였다. “충신과 의사는 죽어도 또한 굴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으니 힘써 싸우자! 이 성의 존망은 실로 이 한 싸움에 달려 있다.” 그리고 주먹을 휘두르며 부르짖으니 병자(病者)까지도 모두 일어나 싸웠다. 고구려 군은 바람을 이용하여 성에 불을 지르고 성안으로 쳐들어 왔다. 필부는 빗발같이 날아 들어온 화살에 맞아서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내려 쓰러져 죽고 성은 함락 당하였다.
문무왕 때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를 칠 때 신라군은 이 七重城을 쳐서 진격로를 개척하였다. 또 문무왕 15년(675) 당이 신라를 침탈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켰을 때, 이 성은 잠시 적의 수중에 넘어갔으나 곧 도로 찾았다. 그 해에 당나라는 거란과 말갈의 세력까지 규합하여 이 성을 공격 하였으나, 신라군의 줄기찬 응전으로 이를 물리쳤다. 이것은 삼국통일의 중요한 고비였다.
삼국이 겨루던 역사에서 천여 년이 지나 1945년 이곳은 三八線이 그어지며 다시금 변방의 군사 요충지로 떠 올랐다. 七重城에 오르면 가여울에서 크게 휘어져 두지리, 고랑포로 빠져나가는 임진강이 훤히 들어온다. 가월리 주월리로는 현무암 위에 펼쳐진 넓은 들이 보이고 강 건너 골짜기로도 제법 넓은 들이 자리해 있다. 노곡리와 강 건너편 가월리 사이에는 비룡대교라는 높다란 다리가 놓여 있다. 주민들은 틸교(Teal Bridge)라는 이름에 더 익숙하다. 대교 아래로 한국전 때 미군이 설치했던 낮은 다리가 있었다. 백학과 적성 사이에서 임진강은 적성 쪽으로는 현무암 석벽을 만들고 백학 쪽에서는 사미천과 석장천을 받는다. 두 하천의 합류되고 유속이 느려지면서 많은 퇴적물이 임진강 바닥에 쌓이고 비룡대교와 사미천 사이에서 가여울이라 부르는 넓은 여울이 형성됐다.
여울이 있어 임진강을 건너는데 유리했으므로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하류로는 도강이 가능한 여울이 호로탄 정도였고 무엇보다 이곳은 여울이 길어서 대규모 도강이 가능한 곳이었다.
비룡대교 건너 연천군 백학면 노곡리는 삼팔선 마을로 알려진 곳이다. 군부대에서 세운 삼팔선이란 비석이 마을 도로 옆에 있어 지나가는 이들의 눈길을 머물게 한다. 마을에선 삼팔선이 그어지면서 윗방은 북한이 되고 아랫방은 남한이 되었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가 전해온다.
삼팔선은 노곡리와 이웃 통구리 사이로 지나갔다. 통구리에는 소련군이 들어왔고 노곡리에는 미군이 들어왔다. 통제가 있었지만 아래 윗마을을 오가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발길을 끊을 수는 없었다. 무슨 철망이 쳐진 것은 아니고 경계를 표시하는 말뚝이 하나 박혔을 뿐이다.
삼팔선이 생기면서 새로운 풍속이 하나 생겼는데 적성 구읍장과 북측 왕징장을 오가며 장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미군이 들어와선지 적성에는 설탕이나 고무신 같은 것이 흔했다. 이것을 구입해 왕징장에서 팔면 두 배의 이윤을 챙길 수 있었다. 왕징에서는 오징어나 북어를 구입했는데 이것을 또 삼팔선 너머 적성에 팔면 이익이 컸다. 왕래가 어려워지고 서로 나오는 물건이 다르다 보니 엉뚱하게도 새로운 시장거래가 생긴 것이다. 그러다 발각되면 물건을 빼앗기고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지금은 백학 두일리에 場이 서는데 삼팔선을 따라서 매월 3일, 8일 場이 선다.
유XX(80)씨는 부모를 따라 두 장을 오간 경험이 있다. 유씨는 통구리에 살았다. 이북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다. 전쟁이 터지던 날 통구리는 조용했다. 인민군은 전동리 합수머리에서 강을 건넜다. 잠깐 총소리가 나고 미군비행기가 떴는데 그게 전부였다. 그러다 미군이 들어오고, 중공군이 나오고 했는데 미군이 들어왔던 어느 날 주민들을 일제히 후방으로 실어냈다. 법원리 칡울 수용소등을 떠돌던 유씨는 노곡리에 집단부락이 만들어지자 이곳으로 들어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노곡리 윤XX씨는 전쟁이 나고 한 때 임진강 북쪽 삭녕으로 들어가 피난생활을 했다. 유씨와 마찬가지로 51년 전투 중에 미군의 조치로 후방으로 철수했고 노곡리에 집단마을이 생기면서 돌아와 살고 있다. 윤씨는 미군이 세웠다는 삼팔선 표석을 보여줬다. 도로변의 삼팔선 표석보다 오래된 표식이라고 했다. 중공군에 대한 기억도 일부 들려줬다. 중공군은 굴을 잘 팠다고 한다. 조나 수수로 아침을 해 먹고는 낮이면 굴에 들어가 잠을 잤다. 미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리고 밤이면 나팔을 불고 꽹과리를 치며 전투를 벌였다. 七重城과 설마리 계곡에서 영국군이 치루었던 전투의 한 장면이 분명했다. 삼팔선이 지나는 노곡리는 그만큼 전쟁의 기억이 확연한 곳이다.
여울이 있어 임진강을 건너는데 유리했으므로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하류로는 도강이 가능한 여울이 호로탄 정도였고 무엇보다 이곳은 여울이 길어서 대규모 도강이 가능한 곳이었다.
비룡대교 건너 연천군 백학면 노곡리는 삼팔선 마을로 알려진 곳이다. 군부대에서 세운 삼팔선이란 비석이 마을 도로 옆에 있어 지나가는 이들의 눈길을 머물게 한다. 마을에선 삼팔선이 그어지면서 윗방은 북한이 되고 아랫방은 남한이 되었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가 전해온다.
삼팔선은 노곡리와 이웃 통구리 사이로 지나갔다. 통구리에는 소련군이 들어왔고 노곡리에는 미군이 들어왔다. 통제가 있었지만 아래 윗마을을 오가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발길을 끊을 수는 없었다. 무슨 철망이 쳐진 것은 아니고 경계를 표시하는 말뚝이 하나 박혔을 뿐이다.
삼팔선이 생기면서 새로운 풍속이 하나 생겼는데 적성 구읍장과 북측 왕징장을 오가며 장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미군이 들어와선지 적성에는 설탕이나 고무신 같은 것이 흔했다. 이것을 구입해 왕징장에서 팔면 두 배의 이윤을 챙길 수 있었다. 왕징에서는 오징어나 북어를 구입했는데 이것을 또 삼팔선 너머 적성에 팔면 이익이 컸다. 왕래가 어려워지고 서로 나오는 물건이 다르다 보니 엉뚱하게도 새로운 시장거래가 생긴 것이다. 그러다 발각되면 물건을 빼앗기고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지금은 백학 두일리에 場이 서는데 삼팔선을 따라서 매월 3일, 8일 場이 선다.
유XX(80)씨는 부모를 따라 두 장을 오간 경험이 있다. 유씨는 통구리에 살았다. 이북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다. 전쟁이 터지던 날 통구리는 조용했다. 인민군은 전동리 합수머리에서 강을 건넜다. 잠깐 총소리가 나고 미군비행기가 떴는데 그게 전부였다. 그러다 미군이 들어오고, 중공군이 나오고 했는데 미군이 들어왔던 어느 날 주민들을 일제히 후방으로 실어냈다. 법원리 칡울 수용소등을 떠돌던 유씨는 노곡리에 집단부락이 만들어지자 이곳으로 들어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노곡리 윤XX씨는 전쟁이 나고 한 때 임진강 북쪽 삭녕으로 들어가 피난생활을 했다. 유씨와 마찬가지로 51년 전투 중에 미군의 조치로 후방으로 철수했고 노곡리에 집단마을이 생기면서 돌아와 살고 있다. 윤씨는 미군이 세웠다는 삼팔선 표석을 보여줬다. 도로변의 삼팔선 표석보다 오래된 표식이라고 했다. 중공군에 대한 기억도 일부 들려줬다. 중공군은 굴을 잘 팠다고 한다. 조나 수수로 아침을 해 먹고는 낮이면 굴에 들어가 잠을 잤다. 미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리고 밤이면 나팔을 불고 꽹과리를 치며 전투를 벌였다. 七重城과 설마리 계곡에서 영국군이 치루었던 전투의 한 장면이 분명했다. 삼팔선이 지나는 노곡리는 그만큼 전쟁의 기억이 확연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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