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성 식현리 국사봉 인근 1951.4월 한군전 전투지 탐방
나는 임진강변 한국전쟁 전적지 탐방을 좋아한다. 그래서 파주로부터 시작해서 동쪽 연천까지 자주 자동차로 여행했다. 특히 2004년 적성면 설마리 영국군 전사를 알 게 된 이후로는 주로 의정부 양주 광적, 남면을 거쳐 371번 국도를 타고 감악산과 파평산 사이 계곡길과 감악산과 마치산 계곡길인 375번 국도로 운전하여 적성의 영국국 추모공원을 자주 방문했다.
이 때 인근 적성의 식현리 국사봉과 관련된 국군 1사단 15연대 및 미 73 탱크대대 C중대의 중공군과 전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국사봉까지 답사하기도 하였다. 그러고 보니 인근 적성의 식현 사거리에서 남측으로 눌로천을 따라 뻗어 있는 도로를 따라 미군 탱크들이 자주 나타나곤 했던 기억도 있었는데 이번에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글을 인터넷에서 발견하였다.
1951.4.22 영군군 Gloster 대대가 중공군 187사단의 공격을 받아 완전히 파괴되는 시점에서 일단은 규모가 적은 교란목적의 중공군 1개 연대 공격을 받았으나 영국군 대대 죄편의 국군 15연대는 미 탱크중대와 보전 협공으로 1개 대대 중공군을 완전히 파괴하는 전과가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특히 이 전투가 인해전술을 구사해서 남한을 점령하려는 중공군 수뇌부에게 미군의 화력을 무시하지 못하게 되고 그들의 전략을 바꿀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적이 인해전술로 공격하면 저항하다가 축차적으로 후퇴하여 적을 노출시키고 화력으로 약화시킨 후 적이 주저하면 공격하는 Ridgway 8군 사령관의 전략이 확인되는 전투였다.
영군의 Gloster 대대는 1951.4월 중공군 춘계 대 공세 때 몇 않되는 이러한 작전상의 피해부대였으나 좌측의 국군과 미군의 보전 공격은 평지로 진출했던 중공군을 식현리 국사봉 계곡으로 몰아 넣고 완전히 파괴하는 것 이었다.
1000명의 적을 사살하는데 아군의 전사자가 발생하지 않은 전투였으며 인해전술이 화력에 의해 완전하게 제압되는 명백한 사건 이었다.
물론 이 승리는 잠깐이었으며 적성에서 영국군이 파괴되는 동안 참여한 중공군 사단이 국군 1사단 파평산 진지로 몰려 들자 후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축차적 후퇴를 한 후 다시 반격을 가하는 전략을 실행할 수 있어 1사단은 임진강까지 진격할 수 있게 되었다.
축차적 후퇴와 공격의 전략과 관련 영국군 여단장과 대대장이 좀 더 빠르게 국군 1사단과 미군의 전선의 이동을 파악하여 철수명령을 하달했다면 그리고 철수로가 지형적으로 깊은 계곡이어서 기갑의 화력을 발휘할 수 없는 위험성을 인식했다면 1개 대대는 좀더 방어위치를 조정하며 희생되지 않을 수 있었겠다 하는 생각이 좌측의 미군 탱크중대의 작전을 보면서 번뜩 떠올랐다.
1951.2월 양평 지평리에서 떼죽음을 당한 중공군이 2개월 뒤 마음먹고 준비한 춘계 대 공세에서 역시 일부이지만 떼죽음을 당한 사건이기에 더 이상 화력으로 무장한 미군과 국군을 무시할 수 없고 최소한 서부전선에서는 적화통일이 불가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전투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자주 식현리 일대 눌로천을 따라 직천 저수지까지 작전하는 미군 탱크와 험비차량을 목격했었는데 알고 보니 지금도 이곳은 미군이 전차전에 어울리지 않은 좁은 계곡을 옛 격전지를 훈련장으로 삼아 실감을 더 해보자는 취지로 훈련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지금도 이 지역을 방어하는 국군 장병과 미 2사단 장병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고자 하며 건강하게 임무를 수행하도록 기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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