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n 장군 구출을 위한 특공작전(희생과 가치에 대하여)


大田戰鬪는 여러 가지 특수한 사실로 한 전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고 이렇게 결론이 맺는다. “Dean장군의 대전 사수로 하여 UN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었고 대구, 부산을 지킬 수 있었다.”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위치와 존재를 이해하는 것은 삶의 목적과 가치를 규정하는데 필수적이다. 가장 우리와 밀접한 한6·25전쟁 비록  60년이상 지난났지만 그때 상황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않될 것이다.대한민국의 마지막 숨통을 몸을 던져 구했던 우리 국군과 미군의 그 값진 피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이 오늘 6.25전쟁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미군들의 사령관 Dean소장을 구출하려던 한국과 미국의 영웅적인 노력은 너무나 큰 댓가를 지불하고도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살아남은 두 기관사의 팔에는 아직도 총알이 박혀있고 그 죽음의 계곡을 달린 기관차는 철도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그리고 지금 그 역사적 희생의 자리에는 그때 순직한 기관사 金씨를 추념하기 위한 탑이 세워져 지나는 이의 마음을 숙연케 하고 있다.
 
아래 신문에 게제되었던 긴박했던 전사의 한  장면을 소개하면 서 위대한 희생을 기억하고 그 뜻을 기리고자 한다. 
 
1950.7.20일도 어느새 하루가 막을 내리는 오후였다.
 
대전 동쪽 온천으로 퇴각하는 도로변에는 이미 인민군이 진출하여 후퇴하는 미군을 포위하고 있었다.
Dean
은 이제 대전을 떠나야할 시간임을 직감하고 1950.7.20일 오후 5:55분 드디어 정식으로 제 24사단본부의 후퇴를 명령했다.


사단 CP를 옥천으로 이동하라
그래서 대전 사수를 위해 Dean장군과 함께 작전을 했던 모든 참모와 연대 지휘관이 Dean의 곁을 떠났다.
Dean
Clark중위와 함께 Jeep차를 타고 불타는 시가를 벗어나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러나 불타는 미군 Truck사이를 빠져 나가던 장군의 Jeep가 너무 급하게 달리는 바람에 인동 사거리에서 판암동 옥천 통로를 지나치고 말았다.

부관 Clark중위가 길을 잘못든 사실을 발견했을 때는 산내면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다.

그러나 차를 돌릴 여유가 없었다. 그곳에도 적은 좌우에 나타나 사격을 가해왔기 때문이다. 이 결정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Dean장군은 1953 9월이 오기까지는 미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없는 포로가 돼야 했다.

산내면 낭월리 다리 밑에서 Jeep를 버린 Dean은 풀뿌리 나무열매로 배를 채워가며 초인간적 노력으로 35일간이나 산속을 헤매었으나 끝내 전북 어느 지방에서 한국인의 밀고로 적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3일간에 걸친 대전시가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Dean장군 구출을 위한 특공대의 장렬한 최후에 대해서다. 지금도 그때 참가했던 한국 기관사중 생존해 있는 사람이 있고 그때 사용한 기관차도 있어 생생한 기록을 남길 수 있다. 영동에 퇴각한 미24사단은 7 20Dean장군 구출을 위해 미군으로 조직된 33명의 특공대를 대전에 보내기로 하고 이들을 태우고 갈 기관차 미카 ③219호를 정했으나 적진에 뛰어들 기관사가 없어 고민하였다. 그래서 미군은 대전 철도국에 의뢰하여 3명의 유능한 기관사를 차출토록 했다. 이렇게 해서 차출된 사람이 金載鉉 (당시 28, 논산군 노성면 호암리 출신) 黃南湖 (당시 23, 기관조사) 玄在永(당시 23, 기관사)씨 였는데 서로들 기피하는 속에 이들만은 스스로 지원하고 나섰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공대를 태운 기관차는 전속력을 다해 대전으로 달렸다. 4시가 조금 넘어 옥천을 지나 증약터널을 막 빠졌을 때 산비탈에 잠복하고 있던 적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 공격에서 28명의 미군이 쓰러졌으나 그대로 북상했다.

4 40 - 마침내 그들은 대전역에 도착했다. 의외로 대전역은 무섭도록 조용했다 특공대는 일부 주변 경계를 펴면서 그들의 사령관인 Dean장군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적의 Tank가 휩쓰는 거리에서 Dean을 찾는다는 것은 절망적이었다. 무전을 보내고 소리를 질러도 거기에 Dean은 없었다. 목숨을 걸고 달려온 그들이었지만 가중하는 위험에 더 머무를 수가 없어 30분이 지난 5 10분 대전을 출발 영동으로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적군은 돌아오는 특공대를 공격하기 위해 대전시 판암동 철로변에 잠복 대기하고 있다가 일제히 사격을 가해왔다. 몇 명 안남은 미군도 비명과 함께 죽어갔다. 그 순간 기관사 金載鉉씨가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옆에 있던 玄在永씨가 다시 운전대를 잡았으나 역시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다행이도 총알은 그의 팔에 맞아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남은 黃씨가 빗발치는 적탄속을 뚫고 벌집처럼 된 기관차를 몰았다.
기관차가 옥천에 도착했을 때 기관사로는 부상한 玄ㆍ黃 양씨가 살아남았고 미군 특공대는 33명중 1명을 제외하고는 32명 전원이 전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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