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24사단 유성 금곡동 금강 및 세종 전의면 개미고개 전투지 (1950.7.9-12) 탐방
회사의 출장업무가 9월 24일부터
시작하여
30일까지 시행되어 업무 끝나고
여가시간을 활용하여 인근한 금강전투지
중 미 24사단 19연대가 방어하던 대평리(현
세종시 남단) 방어선의 가장 우측
끝지점인 금곡동 갑천과 금강의
합류점을 탐방하였다.
이 지역은
낮은 구릉으로 이어진 산악지역인데
지난 7월 탐방 시
시간이 없어 가지 못했던
지역이며 현재는 매립장과 쓰레기
처리시설 등이 들어서 있었다. 1950년 7월
중순 당시 대평리 전선은
병력부족으로 세종시를 동서로 가르는
갑천 남안에서부터 시가지 동측의
개화산까지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으나
미호강과 합류되는 합강정부터 남쪽으로
탄천이 합류되는 지점까지는 공백인
상태였다.
탄천이 금강과
합류되는 지점에는 신탄진 철교가
국도1호선을 따라 위치하고
있어 한 개 중대가
배치되어 있었고 개화산까지 약 18 Km의
굽이진 강이 놓여있었으나 북한군은
바로 이 취약한 지점을
이용하여 은밀하게 도강을 하여
개화산의 대대 저지선을 돌파하여
세종시 남단으로 이동 서쪽의
방어대대 및 연대 지휘부와
후방 포대를 공격하였다.
금곡동 방어선에
있던 중대는 중공군의 공격을
받지 않은 상태로 경계
중에 있다가 공주와 세종의
전선이 뚫려 포위가 시작되었을
때 후퇴명령이 떨어져 도강한
북한군의 공격에 고전하던 개화산
중대전선에 합류하여 전투에 참여하며
용수천을 따라 남세종 IC를 지나
남단으로 연결되는 유성으로 후퇴하였다.
방어선의 가장
서측인 중근봉 북단 산자락
아래 금강을 통하여 북한군이
대거 도강할 수 있었기에
산악지대를 통과하여 연대 지원포대가
있는 용담리와 두만리 일대로
진출하여 유성으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였고 후퇴하는 연대병력은 용수천을
따라 올라오는 북한군의 추격을
받아 포위가 된 상태에서
유성으로부터 구출대가 출발하였으나 병력과
장비에 대한 피해가 크게
발생하였다.
2025년 9월 29일 및 30일 오후
금곡동으로 차를 몰고 가서
금고동 산성 북단의 강안까지
접근하였다.
간선도로에서 떨어져 있고 접근로는
협소하였으나 의외로 마을이 발달하였고
차량도 빈번하였다. 마을 공터에 차를
데고 걸어서 강안으로 접근하면서
위치를 확인하니 강 건너가
현도면 매곡리였고 한라시멘트로 보이는
공장이 보였다. 금강은 갈수기 때문인지
강폭은 좁아 보였으나 고수부지가
넓어 우기 때는 큰
강이 될 것으로 보였고
대청호가 생기기 전 625전쟁때는 평상
시 강이 더 큰
상태에서 우기가 되어 북한군의
도강을 억제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주요 중대 지휘본부는
금고동 산성으로 생각하였으나 시간이
부족해 숙소로 복귀하였다.
2025년 9월 30일 업무가 계획보다
다소 일찍 끝나 서울로
귀경하며 전의 전투지(개미고개)를 탐방하는
기회로 활용하고자 했다. 신탄진에서 출발하여
개미고개까지는 약 40km 로 한 시간정도
소용되었다.
신탄진
IC에 진입하여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달리다 청주 IC를 빠져나와
서쪽으로 오송 및 조치원을
경유하여 1번 국도를 탔다. 곧이어
개미고개가 나타나서 전투기념비가 웅장하게
보였고 주차장까지 조성되어 차를
주차하였다.
아래 산들은 고개전투 기념비
시설을 보여준다.
미 24사단 21연대가 표식된
기념비가 중앙에 서있고 좌우에
각 전투하는 병사의 기념상과
죽어가는 전우의 고개를 받히면서
바라보는 병사의 기념상이 설치되어
있었다. 특별히 좌측으로 약간
떨어져 한 켤레 신던
군화와
M1 총과 철모가 조각상으로 설치되어
이곳 전의 전투 및
개미고개 전투에서 희생된 많은
21연대
병사들을 추모하고 있다 생각되어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기념비 뒷면으로는
이 지역에서 대한민국을 위해
전사한 미군들의 이름이 대리석
벽면에 새겨져 있었고 수를
셀 수 없이 많았다. 300명이
넘는 전사자 수치로 보인다. 운주산
최남단 산자락 밑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국도를 넘어서는
절벽이 형성되고 그 밑으로
철길이 지나고 있었다. 전투 시에도
이 지형은 625 전쟁 때도 동일할
것으로 추정되었고 그래서 이
고개가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생각되었다. 북한군으로서는
최단시간에 대전으로 진격하여 경상도와
전라도를 점령하려면 전의의 개미고개를
돌파해야 했을 것이고 미군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든 전의를
사수하여야 했을 것이다. 전의는 서쪽으로
예산, 동쪽으로 청주 그리고
남쪽으로 공주와 세종(대평리)로 연결되어
당시의 교통망으로 교통의 요지임이
틀림없었다.
아래사진은 기념비 옆에 설치된
조각상을 보여준다.
전투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기념비 우측으로 산길이
나 있어서 걸어 올라갔다. 중간쯤
오르다 보니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길모퉁이가 보였고 이
능선을 따라 전의 쪽을
보면서 21연대 3대대가 방어선을 폈으리라
생각되었으나 산길에 잡초가 우거지고
뱀들이 나타날 것 같아
포기하고 내려오면서 주변을 조망하였다. 2015년까지
미군들의 유해가 발굴되었다고 하며
아마도 이곳 운주산 능선과
기슭일 것이다. 아래 사진은 기념비
뒷편 능선에서 본 정경이다.
뱀고개 탐방을
마치고 전의 시가지로 주행하니
한 십여분 후 전의역에
도착하여 주차를 하였다. 이곳은 일본에서
하루 전 부임한 34연대장이 직접 Rocket 포를
어깨에 메고 북한군 탱크와
대적하다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이
역사는
625때도 존재했을 것이다. 마침 역사
앞에
coffee shop이
있어 한잔 마시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의역 직전에 오른쪽 낮은
야산이 있었고 도로와 철길
좌측으로
Baer Tree Park 시설이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21연대 1대대의 1차 방어선이었다. 북한군이
새벽 안개속에서 은폐를 하며
기습해 올 때 박격포와
야포의 지원을 받으며 북한군의
탱크를 앞세운 공격을 격퇴하였으나
계속된 공격과 우회한 후방침투
시도로 말미암아 방어선이 뚫렸고
3대대가
공격하며 방어선을 회복하였고 1대대가 조치원
북단으로 철수하도록 엄호하면서 이
후 3대대가 2차 저지선인 개미고개로
복귀하여 치열하게 지연전을 전개하였다
한다. 전의를 방어하지 못하면
바로 인접한 신탄진에서 충주
등 동쪽 국군진지에 보급이
차단될 수 있어 진지를
고수하고 있었는데 북한군은 미
공군 항공포격과 1차 저지선을 공격하며
피해가 컸던 3사단을 대체하여 4사단이 신규로
진출하며 미 3대대 진지를 포위
유린하였으며 대대장과 참모들 역시
전사하였다 한다. 아래 사진은 전의역
전경을 보여준다. 그리고 전의전투 시
배치된 부대 위치를 보여준다.
전장에서 승리하는
쪽에서 전투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미 24사단처럼 적의 압도적인
화력과 병력에 대항하며 축차적으로
싸우며 후퇴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내 주변에서
동료들이 피를 흘리며 부상속에
신음하며 죽어 나가고 적은
시시각각 다가와 죽음의 문턱에
서있고 군인의 명령은 수행되어야
하는 공포와 혼란속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보통의 병사로는
어려운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미 24사단
장병들은 국가의 부름에 따라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서 용감하게 싸웠고
장렬하게 죽어서 그들의 사명을
완수하였다.
우리의 부모님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났으나 그 분들은 같은
나이에 70여년 먼저 큰
뜻을 위해 먼저 세상과
이별하였던 것이다. 부디 하나님이 주신
천부의 자유를 위해 국가의
부름에 따라 희생하였기에 그
분들의 부모와 가정에는 슬픔을
남길 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뜻에 따른 사명을 완수하는
신실한 종의 소명을 다하여
천국에서 계실 것이라 굳게
믿는다.
전의 탐방을
마치고 동쪽 전동면 방향으로
주행하다가 북쪽 목천방향으로 주행해
나가니 병촌 순대마을이 있어
식사를 하고 귀경하면서 천안
먹거리인 호두과자를 샀다. 한때 책상
앞에서 막연하게 미 24사단과 21연대 장병들이
군인으로서 자질이 부족하다 라고
오해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전의와 금곡동 산야를 탐방하며
그들이야 말로 가장 위급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그 어떤
국가의 장병보다 용감하였고 죽음
앞에서도 초연이 군기를 잃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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